"아침부터 또 비가 오네."
"그러게. 원래 오늘은 부시윅이라고, 그래피티 마을에 가려고 했는데 비 오면 제대로 못 볼 것 같으니, 패스! 여기서 문제. 비가 오면 어딜 간다고 했죠?"
"미술관."
"정답!"
뉴욕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미술관이 있다. 한 달 내내 미술관만 구경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니 현지인에게는 축복이요, 여행자에게는 마음의 짐이다. 특히, 나랑 아빠처럼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만사 제쳐두고 몇 날 며칠 동안 전시장에 틀어박혀 있는 건 무리라서 우리만의 룰을 정했다. 이름하여 '우천 시 미술관'의 법칙. 비가 오는 날에는 무조건 미술관에 가는 거다. 하늘이 점지해주는 '예술인의 날'인 셈이다.
"아빠, 오늘은 거기 가 보자. 구겐하임. 미술관 자체가 기념비적인 건축물이거든요. 전시 주제에 상관없이 가볼 만한 곳이에요."
"그래. 좋다."
지하철을 타고 86th St. 역에서 내렸다. 돈 냄새가 자욱한 어퍼이스트사이드의 골목 골목을 지나 두루마리 휴지 모양의(!?) 독특한 자태를 자랑하는 구겐하임 미술관에 도착. Hilma af Klint라는 작가의 전시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기에, 작품 감상에 열의를 불태우며 영어로 된 오디오 가이드도 각자 하나씩 빌렸다. 이제 통역가로 활약.. 하기 전에 인터넷 검색부터 하는 센스를 발휘합시다. 구겐하임을 통째로 빌릴 수 있을 정도의 작가라면 참고할 수 있는 게시물이 하나쯤은 있겠지. 쉽게 가자고요. 쉽게.
"오, 이 분 아주 대단하신 분이시네. 칸딘스키나 몬드리안보다도 추상 회화 작품을 먼저 그린 선구자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주로 그렸대요. 눈에 보이지 않는걸 어떻게 그렸을까?! 자그마치 1944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에 사후 20년동안 자신의 작품을 외부에 공개하지 말라고 했다네요. 지금의 대중들은 자신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면서요. 결국 1986년에 LA에서 처음 전시회를 했고, 그 때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대요."
"시대를 앞선 사람이구나."
"그러네요. 그래서 전시 주제가 'Paintings for the Future'인가보다. 답답했을까, 즐거웠을까? 고흐처럼 괴로웠을까?"
"음, 보면 알겠지."
세 개의 벽면을 그림 10개로 꽉 채운 1층의 커다란 홀에서 전시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잠시 구겐하임 미술관의 구조적인 특징에 대해 말하자면, 이 곳에는 계단이 없다. 비스듬한 나선형의 복도가 건물 전체를 둘러싸고 있으며, 가운데는 텅 비어있다. 관람객들은 1층부터 맨 꼭대기층까지 길게 이어진 관람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서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위로 갈수록 지름이 넓어지기 때문에, 밑에서 위를 보거나 위에서 밑을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유기적인 건축으로 유명한 미국의 전설적인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품이다.
작품이 선사하는 감동은 기대 이상이었다. 100여 년 전 그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각적인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녀의 그림은 특별했고 남달랐다. 인간이 아닌 신과 대화하며 영적인 세계를 그렸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렸다'는 말이 뭔 말인지 알겠더라.
시기별로 달라지는 그녀의 화풍도 흥미로웠다. 알 수 없는 기호들을 넣었다가 정확한 대칭을 이루기도 하고, 흑백의 물감만 사용했다가 총천연색의 도형들로 캔버스를 구성하는 등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한 가지 스타일에 머무르지 않는 그녀의 불타는 예술혼이 세월을 거슬러 전해졌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소위 '돈이 되는 그림'을 그리며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경의를 표할 만했다. 내가 아는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맞서 싸우면서 힘겹게 삶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유명세나 돈에 연연하지 않았다. '진짜'는 오히려 감춰두는 여유를 발휘하며 인류의 시간이 순리대로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세상엔 천재가 참 많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난 둔잰데."
"또 시작이시네. 아빠가 부러워하는 작가들도 정작 살아있을 때는 자기들이 천재인 줄 몰랐을걸요? 내가 봤을 때는 아빠가 제일 천재야. 아빠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탐구생활' 책을 똑같이 베껴서 그렸다면서요. 근데, 대체 왜 그러신 거에요?"
"정확히는 '여름 방학 생활' 이었던 것 같구나. 어떻게 된 일이었냐 하면, 담임 선생님이 실수로 책을 한 권 부족하게 받아오셨지 뭐냐. 그때 내가 반장이었는데, 선생님이 나한테 책을 양보하라고 했어. 반장이니까. 그땐 복사기도 없었고, 재미로 한 거지 뭐."
"재미로 그런 걸 해!? 게다가 개학하고 나서 숙제 검사하던 선생님이 그린 건지도 몰랐다면서?"
"첨엔 못 알아봤지."
"것 봐. 천재지. 천재 화가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로 딱이고만."
"너는 천재란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경향이 있어. 천재 남발 금지~"
예전엔 그냥 그러려니 했던 아빠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들을 다시 떠올려보면 볼수록, 아빠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이 확실해진다. 만리포 바닷가에서 보낸 아빠의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당시 아빠는 여름 바다에 놀러 가고 싶었지만, 수중에는 불과 편도 기차표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뿐이었다. 20대의 패기로 무작정 기차를 타고 가서 신나게 놀았는데, 돈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던 중, 사람의 몸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는 보디페인팅이 가난한 미대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기를 살려 신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특히 동양화풍으로 그린 용 그림이 큰 인기를 구가하며 많은 인파를 끌어모았다. 급기야는 휴가를 나온 미군 1개 분대가 단체로 찾아와서 수십명의 등짝에 용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셨단다. (이건 비밀인데, 미군들한테는 2배로 비싸게 받았다고. 특별히 이유가 있었냐니까, 역시 아빠다운 대답이 나온다. '기냥 바가지 씌운 건데?')
그 뿐만이 아니다. 바닷가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구걸로 근근이 삶을 이어나가는 고아나 지체장애인 아이들에게는 장사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미제 껌이나 아이스께끼를 싸게 사서 차액을 붙여 팔거나, 텐트를 빌려주는 등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여 돈을 벌 수 있는 일들이었다. 8살에서 10살쯤 되는 아이들 5명이 아빠를 따르면서 집에 가질 않자(애초에 집도 없는 아이들이었다), 바닷가 야산에 텐트를 치고선 20일쯤 같이 지내다가 돌아오셨다니.. 확실히 범인은 아니시다.
이것 말고도 혼자만 알고 죽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아빠의 인생에 가득하다. 그리고 이런 위대한 아빠가 아직 '역작'을 그리지 못해 작업실에서 혼자 괴로워하는 것이 딸은 안타깝다.
"아빠도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보는 건 어때요? 아빠는 맨날 풍경화만 그리잖아. 난 아빠가 예전에 그린 인물화 느낌이 참 좋던데."
"내가 산수화 전문이니까 계속 풍경을 그렸지."
"하나에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오늘 전시회만 봐도 그래. 작가의 생각이 바뀌면서 화풍도 달라지고, 한가지 스타일에만 얽매이지 않았잖아. 완벽한 한 장을 그리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그냥 계속 그리는 거지 뭐. 다작했다는 점도 좋아 보이더라. 아빠, 그림 한 장 그리는 데 오래 걸리지?"
"그런 것도 같고."
"왜 그런지 알아요?"
"왜?"
"완벽주의가 있어서 그래. 아빠 닮아서 나도 그렇거든. 이게 아주 그냥 사람 잡지, 잡아. 그러다 보니 뭔가를 시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끝도 잘 안나. 계속 맘에 안 드는 거지. 기대하는 수준이 너~무 높아서 그래. 그렇다고 이게 잘못된 건 아니거든. 더 잘하려는 거니까 대단하고 좋은 자세인 거지. 하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면, 결과물을 쉽게 내놓지 못한다는 거야. 그래서 저는 늘 기한을 정해두고 그 안에 '완성'을 하려고 애써요. 나 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해 준 말이 있어. 바로 'Done is better than perfect.'라는 말인데, '완성이 완벽보다 낫다.' 뭐 이런 뜻이에요. 아빠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래. 네 말이 일리가 있다."
"역시, 아빤 내 말을 잘 들어줘서 참 좋아! 아빠도 이제는 나이도 있고 연륜도 어마어마하시니까, 구도나 표현 방식에 대한 고민은 그만하시고 내면의 에너지나 아빠 논문 주제인 '기운생동'? 뭐 그런 걸 그리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오늘 전시를 보고 확신이 들었어! 아빠도 이젠 보이지 않는 걸 그리는 거야! 물론, 제 일이 아니니까 이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요."
"네 얘기 참고하마. 재밌는 접근인 것 같다."
아빠는 종종 카톡으로 오늘 그린 스케치나 글씨 사진을 보내시고선, 구도나 느낌에 대한 감상을 물으신다. 나도 마찬가지. 프로젝트는 물론이고 인생이 잘 안 풀린다고 느껴질 때면 아빠에게 해결책을 묻는다. 늘 있는 일이기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우리 부녀의 관계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자 운명과도 같은 만남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는 다르지만(아빠는 동양화과, 나는 시각디자인과를 전공했다), 아빠와 딸이 함께 미대를 나와서 창작의 고통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며 예술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얼마나 흔하겠는가? '예술'이라는 매개체 덕분에 나와 아빠는 가까스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 중이다.
문득, 아빠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없으면 나는 누구한테 이 모든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까? 누가 내 말에 공감해주고 이해해 줄까? 누가 나에게 길을 제시해 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아빠의 존재가 내게 큰 힘이 된다는 걸 아빠는 아시려나?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라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바로 '있을 때 잘하자.'는 것. 곁에 있을 때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전하고, 대화를 나누면 된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의 존재와 함께 하는 시간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고맙다는 말도, 좋다는 말도 굳이 하지 않은 채.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뉴욕까지 온 김에 용기를 내서 아빠에게 마음을 전했다.
"아빠, 우리가 미대를 나와서 참 다행이야. 아빠가 내 아빠라 정말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