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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Jul 14. 2020

Sex and the city에는 없던 것

2018. 11. 6. 열여섯째 날 오후

 2000년대 초반에 영어 공부를 핑계로 미드 좀 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바로 <Sex and the city>다. 뉴욕에 사는 커리어우먼 4명의 일상을 다룬 드라마로,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성생활을 즐기는 언니들의 솔직한 매력이 두드러진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거대 콘텐츠 기업 하나가 없던 시절, 모든 에피소드를 외장하드에 수집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드라마를 통해 유명해진 맛집이 천지삐까리지만, 그 중 (유명세로만 따지자면) 가장 으뜸가는 곳은 '사라 베스'일 것이다. 주말 아침마다 주인공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곤 했던 브런치 레스토랑으로, 초크 초크 한 수란 위에 떨궈진 노란빛의 홀란다이즈 소스가 먹음직스럽게 빛나는 에그 베네딕트가 주력 메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제 눈앞에 있습니다.



"아빠 덕분에 사라 베스를 다 와 보네요."

"여기가 유명한 데냐?"
"네! 엄청! <Sex and the city>라고, 시대를 풍미했던 미국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들이 즐겨 찾는 곳이에요."

"어째 드라마 제목이 민망스럽네."

"어휴, 이상한 드라마 아니야. 그냥 뉴욕 사는 여자들 네 명이 남자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하는 내용이에요. 우정 쌓고 사랑 찾고 뭐 그런 거죠. 저기 테이블에 앉아있는 젊은 여자 다섯 명이 지금 그 주인공들 코스프레 하는 것 같아 보인다. 내 평생 뉴욕에 있는 사라 베스에는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마침 가는 길에 있길래 냉큼 들어왔어요.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네. 평소에는 줄도 많이 선대. 운 좋다, 우리."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몹시 굶주렸던 터라 메뉴 3개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사악한 가격에 비해 음식은 그저 그렇다는 평이 무색할 정도로 흡족한 식사였다. 뱃속 가득 탄단지를 집어넣고 나니 캐리 브래드쇼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볼록 나온 배를 두드리며 다시 거리로 나섰다. 오늘은 발길이 닿는 대로 비 오는 뉴욕의 골목골목을 누빌 작정이다.


"아빠! 저 호텔이 <나 홀로 집에>라는 영화에 나온 호텔이에요. 캐빈이 스위트 룸에 묵으면서 아빠 카드를 신나게 썼던 그 럭셔리한 호텔!"

"좋아 보이네."

"저기! 애플이다! 애플! 유리로 된 네모난 구조물 한가운데 사과 모양 로고 박혀 있는 거 보이세요? 저기가 뭐랄까, 애플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죠!"

"애플?"


 ..나만 신났군. 하긴, 아빠의 최애 플레이스는 인사동에 있는 전통 찻집이다. 기계 감상에 흥미가 있을 리 없는 아빠를 위해 애플 매장은 그냥 지나치는 걸로. 나도 아빠의 시선도 동시에 훔칠만한 볼거리가 어딘가엔 있겠지. 여긴, 뉴욕이니까. 눈알을 열심히 굴리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손바닥만 한 순백의 담쟁이덩굴 잎사귀 수천 개로 아치를 두른 쇼윈도가 불쑥 등장했다.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기 전에 주눅부터 들게 하는 이곳, <Sex and the city>의 주인공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것만 같은 이곳은 Bergdorf goodman 백화점이다.


"오! 여기가 5th Ave. 였구만!"

"그게 뭐냐?"

"우리나라로 치면 청담동 명품거리 같은 곳이죠. 비싼 물건을 파는 매장들이 모여있는 쇼핑 거리예요. 일부러 찾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온 김에 한 바퀴 둘러보고 가면 되겠다. 여긴 쇼윈도 디스플레이가 볼만하거든요. 딱 아빠 취향이야."

"난 쇼핑엔 취미가 없는데."

"쇼핑 안 해요. 아니, 못 해요. 엄청 비싼 것들만 파는 곳이거든. 상점 밖에서 구경만 할 거라니까. 저만 믿고 따라와 보세요."



"야, 이게 작품 전시회장이지 어디 물건 파는 상점이냐?"

"그치? 진짜 멋있지? 내가 딱 아빠 취향일 줄 알았어."

"이건 종이로 만든 건가 보네. 조명이랑 원근법을 잘 이용해서 공간감을 멋들어지게 표현했구나. 색감도 상당히 세련됐네."


 역시, 아빠다운 감상평이다. 열심히 사진을 찍으시는 걸 보니 마음에 드셨나 보다. 언제부터인지 아빠가 열정적으로 카메라 셔터음을 날릴 때마다 딸내미 가이드의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간다. 예정에 없던(근처에 있는 줄도 몰랐던) 세인트 패트릭스 대성당에도 우연히 들어가 보고, 미국 색으로 칠갑을 한 록펠러 센터도 구경했으니 무계획이 계획이었던 것 치고는 꽤 알찬 하루다.



"아빠, 저번에 아빠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재즈 클럽에 같이 못 갔잖아요."

"그랬지."

"그날 공연이 진짜 좋았거든요. 찐한 재즈의 맛을 나만 알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오늘 밤에 큰맘 먹고 재즈바를 또! 예약했죠!"

"괜찮겠냐? 입장료가 꽤 비싸다면서."

"뉴욕에 다시 오는 비행기 푯값보다 훨씬 싸. 근데, 오늘 밤에 가는 데는 좀 상업적으로 변했다는 평이 많더라고. 생각보다 별로일까 봐 그게 좀 걱정이네. 전에 갔던 데는 클래식한 곳이었거든요. 순전히 제 기준이지만."

"난 상업적인 게 좋아. 클래식한 건 졸려."

"그럼 다행이고요. 오늘 많이 걸어서 피곤하니까 택시 타고 갑시다."

"그래."

.

.

"블루 노트로 가 주세요."


 뉴욕에는 자칭 타칭 재즈 삼대 장이라고 불리는 곳이 세 군데가 있다. 블루 노트, 빌리지 뱅가드, 스몰스 재즈클럽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평소 '열린 음악회' 보다는 '가요무대'를 선호하는 아빠의 취향으로 보아, 게 중에 가장 유명할뿐더러 대중적인 공연을 선보이는 '블루 노트'가 적합해 보였다. 여행을 마친 후 주변인들에게 자랑하기에도 좋고 말이지. 그리고 나도 (늘 그랬듯 여기도 역시나) 못 가봤던 곳인지라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쯤 구경해 보고 싶었다.


 공연 시작 30분 전에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문 앞에는 벌써 줄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Pre-뉴요커 답게 미리 온라인 예약을 했다 이겁니다. 인파를 헤치고 당당히 안으로 들어서니 오, 마이 갓. 이건 뭐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다. 일단 첫인상은 빌리지 뱅가드 승.



"이 쪽으로 오세요."


 웨이트리스가 안내한 테이블은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옆 테이블과의 간격이 5cm도 채 안 되어 보였다. 게다가 4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2개를 일렬로 나란히 놓아두어서, 우리가 안내받은 가장 안쪽 자리에 앉으려면 각자 3명의 사람을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지친 아빠와 신난 딸내미


"어휴, 사람 진짜 많다. 여긴 본격 관광지 스멜이네. 나 혼자 갔던 데는 이런 느낌 아니었는데. 아쉽다. 거길 같이 갔어야 하는데!"

"여기도 좋아 보이는데, 뭐. 어디 보자. 오늘의 가수가 '주디스 힐'이라는구나. 이름을 외워둬야지. 주디스 힐."


 아빠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부름이라도 받은 것처럼 오늘의 주인공인 주디스 힐이 밴드와 함께 등장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가죽 재킷에 달린 기다란 은색 술들이 파란 조명을 받아 반짝이며 찰랑거렸다. 빠르게 피아노를 치며 스캣을 구사하는 그녀도 그녀였지만, 무대 왼쪽에서  몸으로 탬버린을 흔드는  명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 저기 앞에서 탬버린 치는 사람들 스웩 장난 아니다. 이 세상 몸짓이 아니야."

"일종의 코러스 같은데, 도통 웃질 않네. 이것도 이 나름대로 느낌이 있구나. 미국답다고나 할까?"

"응. 아빠 말대로 진짜 미국스럽다. 근데, 내가 보여드리고 싶었던 재즈 공연하고는 아주 달라요. 내가 갔던 데는 스웩보다는 소울이 있었거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공연은 재즈 연주보다는 뭐랄까.. 말 그대로 가수가 공연하는 것 같아."

"난 여기도 좋은데. 신나네."

"좋긴 한데 뭔가 아쉽다. 한국 가면 정통 재즈바 한 번 같이 가요."

"그래."


 확실히 기대했던 것과는 스타일이 매우 달랐다. 오른쪽에서 키보드를 연주하던 긴 머리의 할머니(?)는 갑자기 신시사이저가 만드는 전자음을 하염없이 빚어내는가 하면, 코러스를 맡은 언니들도 노래보다는 흥겨운 어깨춤과 탬버린 댄스에 더 집중하는 듯했다. 별로였다는 게 아니고, 그냥 달랐다는 거다. 공연이 한창 무르익자, 주디스 힐이 멤버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공연 잘 즐기고 계신가요?"

"예!!"

"감사합니다. 오늘 함께하는 연주자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해 드릴게요. 여기 키보드 치는 분은 저의 어머니시고, 멋진 기타리스트는 저의 아빠입니다."

"와!!!"


 , 몰랐네. 카톡 창에 주디스의 말을 한국어로 옮겨서 아빠에게 보여드렸다. 아빠도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위에서 일가족이 함께 연주하는 것은 확실히 멋진 일이다. 그제야 서로 닮은  가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적절한 타이밍을 찾아 들어가기 위해 주고받는 그들의 눈짓 사이에는 동료애를 넘어선 끈끈함이 서려 있었다. 오늘의 무대가 있기까지 수많은 연습과 대화를 나눴겠지. 가장 가깝고도  존재가 가족이라고 했던가? 이들처럼 창작의 고통을 향유할 수만 있다면 가장 가깝고도 가까운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랑 아빠가 구겐하임에서 힐마 아프 클린트로 대동단결할  있었던 것처럼.


 공연이 끝난 후, 지하철을 타고 강을 건너 숙소 근처의 역에서 내렸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꽤나 걸어야 했다. 걷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거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무서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변을 둘러싼 건물 외벽에는 그라피티가 가득해서 한층 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옛날 같았으면 이런 곳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사진을 찍는 여유 따위는 부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 거리가 별로 무섭지 않았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단 하나, 내 곁에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총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


 스무 살의 나는 <Sex and the city> 통해  뉴욕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2 , 직접 마주한 뉴욕에서의 삶은 드라마에서  것과사뭇 달랐다. 택시나 리무진의 자리를 지하철과 버스가 대신한  그렇다 치더라도,  중에는 주인공들의 부모님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주도적으로 사랑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빼버렸을 수도 있고, 내용 전개상 등장시킬 틈이 없어서 넣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지 간에, 드라마 속 제한된 현실에 취해 있던 나는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났을 때의 고통을 예상치 못하고 맨해튼 섬 한가운데에 홀로 떨어져서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현실과 판타지를 구분하지 못한 채, 이 좋은 곳에서 왜 나만 이렇게 힘드냐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기 위해 굳이 가족을 떠나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떠나 봐야지만 아는 것들이 있다. 내 몸을 돌봐줄 사람이 스스로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다 보면, 여태껏 누려온 평화로운 일상이 나 혼자 잘나서 얻어진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깊은 밤, 비까지 축축하게 내린 어두운 뉴욕의 밤거리가 더는 무섭지 않고, 오히려 따스한 온기마저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아빠의 든든한 뒷모습 덕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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