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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Oct 24. 2021

꿈에서 깰 시간

2018. 11. 8. 열여덟째 날

 드디어 딸과 함께한 뉴욕 여행을 모두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 밝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우리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듯 날씨도 맑게 개어 있었다. 일찍부터 서둘러서 짐을 싼 후 잠자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희재가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아빠, 모든 물건을 우리가 처음 왔을 때 그대로 정리해 놓고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 정도면 됐지. 굳이 왔던 때랑 똑같이 해놓고 갈 필요가 있을까?"

“맨날 나한테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부르짖던 분이 누구시더라?”


 희재는 유명한 학원에서 '할 말 없게 대꾸하는 법'을 배워 오기라도 한 것 같다. 역시 부모는 자식 앞에서 말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방을 말끔히 정리하고 모든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오니 큰 키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한 진짜 집주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우리를 집 끄트머리에 달린 작은 정원으로 데리고 가서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러고는 문 앞까지 배웅하며 뉴욕에 또 오게 된다면 다시 꼭 들러 달라고 했다. 아마도 머물던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해 놓은 것을 보고 감동한 것 같았다. 우리는 우버 택시를 기다리며 숙소 앞과 주변을 배경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이대로 떠나기가 아쉬웠다.



 JFK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짐부터 부치러 갔다. 뉴욕에 입국한 첫날, 희재의 망가진 캐리어를 보관해 주었던 항공사 직원이 우리를 먼저 알아보고 제반 사항을 처리해 주었다.

   

 아침을 못 먹어서 출출하다 싶었는데, 때마침 희재가 준비한 요플레와 케이크로 맛있게 요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보안 검색을 받고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탑승구로 가는 길에 면세점이 있길래, 지인에게 선물하기 위한 양주를 한 병 샀다. 희재는 자주 먹던 초콜릿과 껌을 두어 봉지 샀다. 양주를 판매한 가게에서는, 내가 괜찮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양주가 담긴 쇼핑백을 비행기 타는 곳의 바로 앞 입구까지 배달해 주겠다고 했다. 서비스가 과한 것 같아서 부담스럽고 의아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승객의 안전을 위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고 하니, 술을 산 후에 술병에 들어 있는 술을 버리고 그 안에 다른 폭발물을 넣을까 봐서 하는 사전 예방 조치인 것이다.


 돌아갈 때도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시아나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우리의 자리가 비행기 한가운데 좌석 중에서도 정 중앙에 있어서 답답했다. 설상가상으로 희재 옆에 앉은 남자 승객이 희재에게 자꾸 말을 건넸다. 이를 귀찮게 여긴 희재가 내게 눈짓을 보내며 자리를 바꾸자고 해서 그렇게 해 주었다. 바꾼 자리는 중앙과 더 가까워서 더욱더 갑갑했다. 이륙 후 1시간 정도 지나니 숨이 막혀 가슴팍이 조이는 듯하고 가위에 눌린 것처럼 온몸이 답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자리를 물리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왜냐하면 내가 뉴욕 여행을 통틀어서 희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약 13시간의 지루한 비행을 마치고, 오후 5시쯤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사위가 마중 나와 있었다.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바라본 사위의 뒷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이제는 내가 곁에 없어도 사위가 내 딸을 지켜주겠지.


 집에 도착한 우리는 귀국 기념 파티를 하러 고깃집에 갔다. 원래는 삼겹살을 먹곤 하는데, 온 식구(온 식구라야 나와 아내, 딸과 사위 총 4명뿐이긴 하지만)가 오랜만에 모인 기념으로 특별히 돼지갈비를 주문했다. 희재는 신통하게도 뜨거운 물과 국을 추가로 습관처럼 주문해 주었다. 근 3주 만에 따끈한 된장국과 함께 편한 마음으로 고국에서 먹는 돼지갈비의 맛은 진정한 꿀맛이었다.


 식사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가 만든 귀국 축하 플래카드 작품(?) 배경으로 타이머를 맞춰 놓고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플래카드는  달력 뒷면에 낙엽과 나뭇가지를 붙여서 콜라주 식으로 만든 것이었다. 아마추답고 유치했으나 아내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서 그런지 정이 갔고 지구상에 하나뿐인 귀한 보물처럼 여겨졌다.


 71세의 나이에 딸과 단둘이 뉴욕에 가서 18일간 잘 지내다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그저 모두에게 가슴 깊이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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