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6. 열여섯째 날
아침 9시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희재는 겨우 잠에서 깼다. 여행이 끝나가는 이 시점까지도 일정을 계속 손보느라 잠자리에 늦게 들어서인지, 갈수록 기상 시간이 늦어진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적당히 돌아다녀도 정말 괜찮은데, 덤벙거리던 내 딸이 언제부터 이렇게 준비성이 철저해졌을까?
가을비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구겐하임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근방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상류층이 살 것처럼 럭셔리한 고급 주택이 늘어서 있었다. 곧이어 하얗고 거대한 달팽이처럼 생긴 구겐하임 미술관이 나타났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6층 건물이지만 전시장 내부에는 계단이 없다. 관람객은 나선형 복도를 따라 작품을 감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주로 비구상 계열의 작품 전시회를 개최하는 세계적인 미술관이며, 건축물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입체 작품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Hilma af Klint(1862-1944)라는 여류화가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녀는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로, 추상화의 아버지로 알려진 칸딘스키나 몬드리안보다 먼저 추상화를 그렸다. 약 1,0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었을 게다.
1층부터 3층까지는 그녀의 대작 수십 점이 벽에 걸려 있었고, 4층부터 6층까지의 전시실과 복도에는 비교적 작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림은 여러 장르와 스타일을 넘나들었다. 미술대학을 다니던 때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듯한 사실화가 대부분이었지만, 점차 추상 미술로 넘어가면서 다양한 형태와 색감이 등장한다. 특히, Klint의 그림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여동생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이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적 세계관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삶과 죽음, 특히 신과 인간, 자연과의 관계성 탐구에 몰두하며 이를 캔버스에 표현하기 시작했다.
어떤 그림은 회화와 바우하우스 양식을 접목한 것으로 보였고, 특정 기호나 부호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상징적인 요소(예: 여성은 푸른색, 남성은 노란색)를 넣어 표현한 작품도 꽤 있었다. 모든 작품에서 작가의 색에 대한 조예와 뛰어난 창의력,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읽을 수 있었다.
Klint는 살아생전 자신의 그림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의 화풍은 독특했고 작품성 또한 뛰어났지만, 100여 년 전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에서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한계를 감지한 그녀는 남동생에게 자기가 죽고 20년이 지난 후에 작품을 공개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결국 반세기가 지나고 나서야 그녀의 작품이 재평가받게 되었으니, 놀라운 혜안이다. 뒤늦게 알려진 그녀의 그림은 요즘 들어 전 세계에서 각광받고 있으며, 그녀 또한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로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1층부터 6층까지 올라온 우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1층에 전시된 Klint의 대작을 감상하고 나가기로 했다. 걸음이 빠른 희재가 앞장섰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나선형으로 되어 있어서, 위층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아래층 전시실의 3분의 1 정도가 보인다. 그래서 먼저 앞서가며 작품을 감상하는 딸의 모습을 사진으로 여러 장 남길 수 있었다. 희재는 자연스럽게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해서 멋있는 구도로 딸의 모습을 최대한 많이 찍어주려 노력 중이다.
Klint의 작품 앞에서 무한한 감동을 받은 우리는 한동안 소감을 주고받은 후, 점심을 먹기 위해 미술관 밖으로 나섰다. 향한 곳은 센트럴 파크 서남쪽에 있는 고급 프렌치 전문점 장 조지(Jean-Georges) 레스토랑으로, 미식가의 지침서인 미슐랭 가이드에도 소개된 맛집이다.
택시에서 내려 부푼 가슴을 안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럽쇼?! 바깥쪽 문은 열려 있는데, 안쪽 문이 잠겨 있었다. 희재가 어찌어찌 들어가서 물어보니 3시부터 4시까지는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이라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3시 10분이었다) 희재는 무척 당황했고, 나 역시도 뉴욕에서의 멋진 마지막 점심을 내심 기대했던지라 애석하고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므로 짐짓 괜찮은 척했다.
잠시 후 희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라 베스(Sarahbeth’s)라는 새로운 맛집을 찾아내어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높다랗게 치솟은 트럼프 대통령의 빌딩을 뒤로하고 조금 걸어가니 식당이 나타났다. 여기는 브런치를 먹는 곳으로 유명한데, 미국 드라마 ‘Sex and the city’에서 주인공 무리가 식사하던 장소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에그 베네딕트(계란 반숙 요리)’를 주문해서 먹었다. 느끼하지 않고 담백해서 먹기 좋았다.
옆 테이블에는 미국 아가씨 대여섯 명이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어찌나 수다스러운지 귀가 따가울 정도로 꽤 시끄러웠다. 아내도 집에서 자매 또는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오랫동안 하곤 하는데, 국적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여자는 말하기를 참 좋아한다는 것을 미국에서 새삼 느꼈다.
늦은 점심을 먹은 우리는 부슬비를 맞으며 근처에 있는 명품 쇼핑 거리로 갔다. 유럽 장인이 열심히 만든 미려한 제품도 시선을 멈추게 하였지만, 진열장 인테리어가 가히 예술적이었다. 백화점 안팎에서 빛을 발하는 온갖 명품과 쇼윈도를 보니 '명불허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실 이곳에 도착한 첫날은 뉴욕이라는 도시가 썩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2주가량 지내보니 그랜드 센트럴 역,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UN 본부, 마천루, 뉴욕 도서관과 같은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과 그에 상응하는 콘텐츠, 대가들의 작품을 양껏 보유한 미술관, 쇼핑 거리, 레스토랑, 축제, 여러 국적의 사람 등이 한데 모여서 뒤섞인 독특한 문화가 동시에 공존하는 곳이 바로 뉴욕이었다. 이런 도시는 아마 전 세계에 없을 것이다. 속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과연 뉴욕이라는 곳이 유일무이하면서도 독보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할만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눈 호강을 실컷 한 후, 귀 호강도 하기 위해서 Blue Note 재즈 바로 향했다. Blue Note는 음식과 술을 먹으면서 재즈 공연을 관람하는 일종의 유흥주점이다. 도착하니 이미 10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손님으로 장내가 버글거렸다. 오늘은 일본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인 ‘주디스 힐(Judith Hill)’이라는 여성 가수와 그의 밴드팀이 라이브 공연을 하는 날이었다.
밴드는 Hill 씨 가족을 중심으로 해서 총 7명이었다. 주디스 힐이 메인 가수고, 피아노를 치는 어머니, 기타를 치는 아버지, 또 다른 기타를 치는 청년, 드럼을 치는 중년의 남성, 마지막으로 보조 여가수 2명이 무대를 꽉 채우고 있었다. 공연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진행됐고 우리도 다른 손님들과 함께 연주에 동화되어 음률을 즐겼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바로 의자였다. 브로드웨이의 공연장과 마찬가지로 작고 딱딱해서 불편했을뿐더러, 의자와 의자 사이에 공간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안쪽에 앉은 사람 한 명이 밖으로 나가려면 옆에 앉은 대여섯 명이 동시에 일어나야만 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앉히기 위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을 충분히 두지 않은 것이다. 돈에 대한 끝없는 욕심은 전 세계인의 공통된 심리 같아서 기분이 조금 씁쓸했지만, 공연은 재밌었다.
“여기도 의자가 조금 불편하네.”
“아빠 진짜 까다롭다. 누가 예술가 아니랄까 봐!”
“나는 예술가가 아니고, 동네 주민센터에서 한국화를 가르치는 늙고 불쌍한 할아버지란다.”
“불쌍이라는 단어는 아빠와 어울리지 않네요. 아빠처럼 신나게 사는 할아버지가 또 어딨겠어요?”
누굴 닮아서 이렇게 말을 잘하는지. 아무래도 이번 생에 딸을 이기기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