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5. 열다섯째 날
어느덧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부터는 시내 중심에서 약간 외곽에 떨어져 있는 민박집으로 이동하여 출국하는 날까지 계속 머물며 여행을 이어나갈 것이다. 미스테리한 Avalon 호텔에서 떠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서 짐을 챙겼다.
우버 택시를 타고 새 숙소로 가는 동안, 희재는 어렸을 때 엄마에게 들었던 말 중 아쉬웠던 점을 몇 가지 토로했다.
- 희재의 개탄(慨歎)
1) 여행 갈 때 : 헌 옷이나 버리고 올 만한 옷을 가져가는 것이 좋다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나만 유독 볼품이 없었다. 훗날의 기록을 위해서라도 여행지에는 예쁜 옷을 가져가야 하는 것 아닌가?
2) 밥 먹을 때 : 음식을 남김없이 먹으라고 했는데, 배가 적당히 부르면 억지로 먹을 필요 없이 남겨도 되는 것 아닌가? 과식하면 속도 안 좋고 살만 찌더라.
3) 타인을 대하는 방법 : 나를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남에게 더 친절하고, 배려와 양보를 많이 하라고 했는데, 나중에 가만 보니 나만 혼자 고생하고 바보 된 느낌이다. 남보다는 나를 먼저 챙겨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엄마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너의 주관대로 인생을 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서른이 넘어 성인이 된 지금도 어릴 때 들은 말을 기억하면서 그대로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민박집 앞에 도착했다. 숙소가 있는 지역은 뉴욕 퀸스의 롱아일랜드 시티로, 전형적인 미국식 전통 가옥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고풍스럽고 고즈넉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집주인은 출타 중이어서 그의 친구가 대신 우리를 맞이했다. 체격이 크고 5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자였다.
그는 우리가 머무는 3일 동안 집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정보와 더불어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특히, 출입 시에는 반드시 현관문과 덧문을 잘 잠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여기가 우범 지대는 아니지만,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서 살짝 겁을 줬다. 주의사항을 모두 들은 후, 한지로 만든 복주머니 민예품을 선물로 주었더니 ‘Thank you, very much!’라고 하면서 기뻐했다.
짐을 풀고 나서 점심을 먹기 위해 민박집 주인의 친구가 소개해준 식당으로 갔다. 동네 어귀에 있는 아늑한 프랑스 레스토랑이었다. 무채색의 실내 배색과 여자 종업원의 태도가 한데 어우러져 말쑥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 잡은 자그마한 방의 한쪽 벽 중앙에는 가로로 2m 정도 되는 가공하지 않은 마른 나뭇가지를 4~5개 정도 묶어서 옆으로 길게 장식해 놓았는데, 자연스러우면서도 멋있었다.
흡족하게 식사를 하고 나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 MoMA PS 1. 이라는 현대 미술관으로 향했다. 첼시마켓처럼, 이곳도 과거에 공장이었던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전시장은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총 네 개 층이었다. 여기서도 여지없이 가방과 소지품 검사를 받았다. 원래 입장권은 10달러이지만, 나는 65세 이상이라 경로 우대를 받아서 50% 할인된 금액인 5달러만 내고 입장했다.
미술관 안에는 Bruce Nauman을 비롯한 현대 작가의 작품으로 가득했고 난해한 것이 많았다. 과거에는 정서 순화를 위해 미술관에 갔었지만, 현대인은 충격을 받기 위해 전시회장에 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 여러 설치 미술 작품과 사진 작업을 보니 그 말이 더 가깝게 와닿았다.
Bruce Nauman은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서 실험적인 작품을 만드는 작가이다. 미적인 가치보다는 작품이 갖는 의미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작가 중 한 명으로 1970년대 초부터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하며 이름을 날렸다.
오늘 본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을 하나 꼽자면 잘린 동물의 사체 모형을 공중에 고정한 다음 빙글빙글 돌아가게 한 작품이다. 그의 작업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성을 돌아보게 하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었다. 현대인의 잔인한 본성과 이 사회에 대한 고발의식을 드러낸 흑백사진도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에 남는다. 그 밖에도 네온사인 같은 조명 작품과 영상물이 많았는데 이 역시 사회 문제 고발이나 삶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려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졌다.
우리나라의 백남준을 비롯한 많은 현대 작가들이 빛을 이용한 작품을 많이 제작하는 것은, 영상이 그림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현대 물질문명의 산물을 작품의 매개체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 또한 있었으리라 예측해 본다.
Bruce Nauman의 특별전이 열리는 전시실 한쪽에는 평면적인 드로잉도 있었다. 정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그림은 드물었고, 움직이는 상황의 특정 순간을 포착해서 그렸거나, 인간 내면의 잠재의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많았다. 예를 들면, 커피잔을 잡으려다가 놓친 순간 커피가 튀는 상황을 거친 선으로 재빨리 그린 그림이라든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검은색 톤으로 암울하게 표현하는 등이었다.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은 회화로, 남다른 작가의 시선과 스타일이 느껴졌다.
다른 전시실로 이동하려는데, 그곳을 지키던 지킴이 여인이 희재에게 조심스레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느낌상 같이 온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것 같았다. 희재가 나를 보면서 내가 자기 아빠라고 하자, 참으로 멋진 부녀라고 우리를 추켜세우면서 나한테 딸이 참 예쁘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보다는 미국에서 희재보고 예쁘다고 하는 이가 많다.
3층 전시실까지 관람을 끝낸 우리는 지하로 내려갔다. 미술관 건물이 공장으로 사용되던 시절 사용했던 보일러와 작업 도구 일부를 그대로 보존하여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미국인의 실용주의 정신과 과거의 흔적, 또는 역사를 전부 지워버리지 않고 남기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1시간 반 남짓 걸려서 모든 관람을 끝내니 오후 5시쯤 되었다. 미술관 안에도 식당이 있긴 했지만,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시간이 일러서 그냥 나왔다. 다음 목적지는 세련된 젊은이가 많이 모인다는 ‘윌리엄스버그’ 마을이었다. 그리 멀지 않아서 슬슬 걸어가려 했으나 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기 시작하여 고생을 덜고자 택시를 탔다.
윌리엄스버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한 저녁때로 접어든 데다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로 을씨년스러웠다. 사방이 어두워져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동네 곳곳에서 이 마을 특유의 예술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건물 벽에 그려진 그라피티가 인상적이었다. 커다란 전시장을 차지해도 될 만큼 수준이 상당히 높아 보였다. 담벼락뿐만 아니라 오토바이, 승용차, 택배용 트럭과 같은 탈것에 그려진 그림도 익살스럽고 개성이 넘쳤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동화책에나 나올법하게 유독 반짝이는 어여쁜 가게들이었다. 이러한 가게는 주로 옷가게나 카페, 또는 레스토랑이었다. 넓진 않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감각적이고 독특한 발상으로 꾸며서 예술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늘날의 윌리엄스버그는 하나의 관광명소가 된 안전한 지역이지만, 전에는 슬럼화된 우범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가난한 예술가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성 있는 독특한 마을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지금은 한국의 홍대 앞 거리 같은 번화가로 변모하였다.
뉴욕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집세가 싼 볼품 없는 동네에 예술가들이 들어가 살면서 마을을 멋있게 꾸며놓아 부가가치가 높아지면, 그 지역 사회나 집주인과 함께 그곳에 정착한 예술가들도 함께 상생해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마을이 상업화되면 집세가 천정부지로 올라서 가난한 예술가는 내쫓기듯 떠나야 하는 것이 마치 숙명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속성을 따라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곳 윌리엄스버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 사람들을 떠올리니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내가 이곳의 예술가들에게 깊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홍대 앞 거리가 50여 년의 세월을 거쳐 변하는 과정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홍익대학교 재학생이던 시절(1968~1975년), 정문 앞에는 3~4개쯤 되는 서점과 화방이 있었고 전통 주막도 두어 개 있었다. 시험 때가 되면 서점에 들어가서 주인의 눈치를 보며 책을 외우기라도 할 심산으로 뚫어지게 훔쳐보기도 하고, 망치로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심하게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막걸리를 가득 채워 동기들과 나눠 마시며 얕은 지식으로 예술을 논하곤 했다. 물론 청춘의 로망과 개탄스러운 이 사회에 대해 목청을 높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던 곳에 갖가지 상점이 들어서면서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점점 변질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상업화가 되어, 술집이나 옷가게만 가득 들어차 버린 지금의 홍대 거리를 볼 때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지성의 요람인 대학교 정문 앞에 제대로 된 책방 하나 없는 모습이라니!
차가운 빗방울이 계속 떨어지는데도, 희재는 이곳 윌리엄스버그 마을에 애착이 가는지 쉽게 떠나질 못했다. 여러 가게를 이곳저곳 기웃거렸는데 특히 의류와 장신구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나는 쇼핑에는 영 관심이 없어서 희재가 가게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밖에 서서 거리를 오가는 행인을 구경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상하게도 어려서부터 지나치리만큼 쇼핑이나 물질(돈)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대인 관계를 맺는데도 서툴렀으며 약삭빠르게 계산하여 사적인 이익을 꾀하지 못했다. 가난한 대학생 시절에 겪은 몇 가지 일화에서도 이러한 면을 알 수 있다.
1971년,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 월남전에 자원하여 9사단(백마부대) 야공대대에 파병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매복 작전에 몇 차례 투입되었다가, 나중에는 공병 참모부에서 군수 행정을 봤다. 병장 때 군수과의 서무계로 복무하던 중, 우리 사단에 전투 명령이 떨어졌다. 내가 복무하던 때는 월남전의 막바지로, 한국군은 월맹 정규군과 마지막 전투를 치른 뒤 철수할 계획이었고, 이를 위해 우리 군수과에서는 보급계를 맡은 하사가 한 명 차출되었다. 그런데 이 하사가 볼썽사납게 몸부림치며 작전에 나가기를 극도로 꺼리면서 이를 지켜보는 타 장병들이 우리 군수과 전체를 우습게 보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나는 작전에 나갈 의무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과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그 하사를 대신하여 작전에 자원했다. 남들은 그이 대신 목숨을 거는 이유와 위험한 행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게는 군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자세와 명예가 목숨보다 소중했다.
기적 같은 사실은, 나중에 그 작전이 취소되는 바람에 그 누구도 전투에 나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군수 과장은 나를 영웅이라고 부르며 각별히 대했고 과 내에서도 특별하게 대접했다. 사단장 표창을 비롯한 2번의 표창을 더 받고, 우리 부대에 위문 공연을 온 미스코리아로부터 모두를 대표하여 기념 목걸이도 받았으니 결과적으로는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일이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월남에 있을 때, 참전 군인에게는 국가에서 사방이 약 1.5m쯤 되는 상자를 제공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택배 상자라 할 수 있겠다. 군인이 월남 현지의 PX에서 면세 가격으로 값싸게 일제 T.V.나 가전제품을 사서 이 상자 안에 넣어 집으로 보내면, 동네 사람들이 원래 가격의 최소 3배 이상을 주고 샀기 때문에 가계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상자였다. 이것은 타국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병사들에게 국방부에서 베푼 혜택이었다. 그런데 이상케도 나는 참전 수당(월급) 외에는 별 관심과 물욕이 없어서 내 몫으로 할당된 그 상자마저도 직업군인 부사관들에게 대가 없이 그냥 주었다.
어리석은 나의 행태를 하나만 더 이야기한다면, 서울에 있는 J 고등학교의 미술 교사였던 P 선배를 도와준 일을 들 수 있다. 그 선배는 홀어머니를 혼자 모시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선배가 사정이 생겨서 6개월간 근무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정을 내게 토로했다. 나는 그를 대신하여 수업해 주었고, 월급은 한 푼도 남김없이 그 선배의 통장으로 넣어주었다. 내 도움 덕분에 6개월간 어머니를 마음 놓고 봉양할 수 있었던 그 선배로부터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인간의 도리를 다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이렇게 손해라면 손해를 보고 사는 나의 행동들을 어머니께 고자질하곤 했고 어머니는 늘 나를 걱정했다. 어머니는 개성상인 집안 출신으로, 사리 판단과 수리에 매우 밝은 분이셨기에 이런 나를 더욱 이해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내력을 전혀 닮지 않은 내가 당신 자식이라는 것이 내가 봐도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나의 성향이나 객관적인 능력으로 볼 때, 기껏해야 작은 전세방에서 끼니 걱정을 하며 겨우 살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평범한 교사로 근무하다가 퇴임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 가족은 물론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지역사회에 자원봉사도 하며 지내고 있으니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딸에게 늘 이렇게 말한다. '매사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순리대로 편안하게, 다만 올바르게 살아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하늘에서 해결해 주신단다.'라고.. 우리 희재에게도 내게 다가온 행운이 따를 것이며, 언제나 행복한 일만 가득할 것이라고 늘 믿고 기도하고 있다.
여기저기 둘러본 희재는 작게 빛나는 크리스털로 된 예쁜 귀걸이를 한 쌍 샀다. 나는 속으로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예쁘다고 말해줬다. 왠지 그렇게 말해야 딸이 좋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다 다른 사람이기에, 가끔은 마음에 없는 말을 해 줄 필요도 있다.
저녁 식사용으로 피자 한 판을 사서 우버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돌아오니 어느덧 8시쯤 되었다. 체력이 고갈되어 침대에 누워서 쉬는 동안 희재는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마트에 혼자 가서 음료수를 사 왔다. 내가 혼자서 먹고 마시는 중에도 희재는 막바지로 접어든 우리의 여행 일정을 늦은 시간까지 손보고 점검했다. 나는 일기를 쓰다가 깜빡 졸았고, 희재는 통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충하고 빨리 자라."
"계속 비가 와서 일정을 전부 다시 짜야 해요. 한국에 돌아가는 날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아직 못 본 게 너무 많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순리대로 해라~"
"아빠는 맨날 이렇게 팔자 좋은 소리를 하신다니까."
아아! 희재가 나의 깊은 뜻을 알아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