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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Oct 19. 2021

나도 친구들이 보고 싶다

2018. 11. 3. 열셋째 날

 두 번째로 홀로서기를 하는 날이다. 희재가 뉴욕에 거주하는 옛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길도 몇 번 잃어 봤고, 혼자 밥도 여러 번 먹어 봐서 맨해튼 시내를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그리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딸은 자꾸 나를 혼자 두는 것이 미안했는지 자리를 비우는 시간에 맞춰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미리 예매했다. ‘라이언킹’, ‘얼음 공주’에 이어 이번에 감상할 뮤지컬은 ‘오페라의 유령’이다. 중간에 배가 고플 것을 대비해서 희재가 미리 빵과 과자도 사다 줬다.


 뮤지컬을 보러 가기 전에 앞서 희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Soho로 갔다. 사위가 좋아하는 나이키 운동화를 사기 위해서였다. Soho 거리는 뉴욕의 쇼핑 명소로, 각종 의류와 신발 등을 파는 매장이 모여있는 곳이다. 최신식 건물에 간판이 주렁주렁 달린 명동이나 강남 같은 상점가를 예상했는데 의외로 돌이나 벽돌로 지은 오래된 건물이 대부분이었고 분위기도 찬찬했다.



 여러 가게를 분주히 돌아다녔지만, 마땅히 마음에 드는 물건도 없고 공연 시간도 촉박하여 별 소득 없이 다시 지하철을 타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장에 도착한 후, 희재는 인파를 헤치고 창구로 가서 예매해둔 표를 찾아 내 손에 쥐여주고 떠났다. 벌써 세 번째 뮤지컬인지라, 혼자서도 걱정 없이 의연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는 ‘라이언 킹’의 극장보다는 조금 작은 듯했고 이곳 역시 관객으로 가득 차서 빈자리가 거의 없어 보였다.



 이미 몇 번 봐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뮤지컬은 기대 이상이었다. 전에 보았던 공연들에서도 느꼈지만, ‘오페라의 유령’도 그 자체가 하나의 입체적인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의상, 배경 그림, 소품 등 모든 것이 섬세하게 제작되어 지금 당장 전시회장에 가져다 놓는다고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무대 연출 또한 기가 막혔다. 특히, 거대한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갑자기 곤두박질치고, 바닥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며, 뻥 뚫린 무대 한 부분으로 사람이 떨어져서 사라진다든지 하는 것들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조명을 사용해서 분위기를 자아내는 능력 또한 신묘했다. 붉고 화려한 오페라 극장에서 푸르고 캄캄한 지하실로 순식간에 바뀌고, 연이어 반짝이는 불빛 사이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밤의 호수까지…. 브로드웨이에서 하는 공연이라고 하면 배우의 춤과 노래 실력, 연기만 빼어난  알았는데,  분야의 예술가와 기술자들이 협력하여 만들어내는 종합 예술이었다. 무대 위에서 빛이 나는 배우는 물론, 조명 뒤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에게도 기립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오페라의 유령'은 예전에 TV에서 영화로도 봤고, 다른 버전의 비디오로도 다시 한번 빌려봐서 큰 감동이 없을 줄 알았건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두 눈과 귀로 배우의 몸짓과 육성을 직접 보고 들으며,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현장을 실물로 접하니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큰 박진감과 생동감이 느껴졌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배우의 대사를 충분히 알아듣지 못해서 감정 이입이 남들보다 덜한 것뿐이었다.


 처음에 희재가 공연을 자그마치 네 개나 본다고 했을 때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굳이 비슷비슷한 것을 여러 개 볼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슬립 노 모어', '라이언킹', '얼음 공주', '오페라의 유령'까지 어느 것 하나 겹치는 부분이 없었다. 사실 이 나이쯤 되면 웬만한 것을 보아서는 많이 놀라거나 자극받지 않는다. 그러나 뉴욕에 온 뒤로는 하루하루가 새로움의 연속이다. 특히 뮤지컬을 보는 동안에는 마치 꿈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세상이 정말 넓고 볼거리도 많구나. 이제라도 이 모든 것을 경험한 나는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끝난 후 혼자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왔다. 희재가 돌아오는 길을 잘 설명해 주었고 예행연습도 미리 했기 때문에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이제 나도 절반 정도는 '뉴요커'가 된 것 같다.


 여행 일지를 정리하고 있는 동안 희재가 돌아왔다. 희재는 뉴욕에 사는 대학교 동창들을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고, 한국에서 가져온 복주머니와 내가 그려준 부채(합죽선)도 선물했다. 사진 속에서 부채를 활짝 펴고 웃는 희재와 친구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으며, 찬란한 청춘의 빛으로 반짝였다.


 아! 나도 저렇게 젊고 싱싱할 때가 있었지…! 그리운 내 청춘이여, 하나둘 희미해져 가는 벗들이여! 전부 어디로 갔는가! 우리 같이 뉴욕에서 이 좋은 것들을 함께 보고 즐기면 참으로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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