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1. 열한째 날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희재는 뉴욕 아웃렛 매장에 쇼핑을 하러 가고, 나는 혼자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MET)에 다시 가 보기로 했다. 지난번에 갔을 때,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희재는 내 체력이 떨어질 것을 대비하여 초콜릿, 과자 등의 간식을 챙겨주었다.
아침 9시 30분쯤에 희재가 우버 택시를 불러주어 그 차를 타고 MET를 재방문했다. 이곳은 표를 한 번 끊으면 3일에 걸쳐서 언제든지 재입장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첫 방문일로부터 3일이 지났기 때문에 돈이 아깝지만 표를 다시 끊어야 했다.
전에 갔던 1층 전시실부터 다시 찾았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인체 조각상은 실제 사람보다 더 생동감이 넘쳐서, 며칠 전에 보았는데도 지루하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웠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던 중세 시대의 ICON(이콘, 성상화)은 종교적이고 도식적인 표현에 치우쳐 생명력이 없어 보여서인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중세 전시실을 건너뛴 후 위층에 올라가서 바로크·로코코 시대의 그림을 보았다. 역시나 사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섬세한 붓 자국과 미묘한 색의 조화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현대 회화 작품 전시실로 갔다. 며칠 전에 MoMA에서 이미 보았던 피카소, 브라크, 클레, 레제, 샤갈 등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그림을 여기서 또 만나니 반가웠다.
최근 들어 파울 클레의 그림이 좋아져서 그의 그림을 오랫동안 감상했다. 그의 그림이 좋아지게 된 이유는, 서정적이고 몽환적이며 아동화를 보는듯한 편안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선(線)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도 선을 주로 사용하는 한국화(산수화)를 그리기 때문에 그의 그림이 친숙하고 마음이 가나 보다.
클레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림에서 느껴지는 리듬감이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적인 그림 안에 동적인 움직임을 담아낼 수 있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다) 클레는 음악의 멜로디와 리듬을 선과 색으로 구현해서 회화에 적용하고자 애쓴 작가였다. ‘만약 음악과 회화가 결혼해서 낳은 2세가 있다면 그것은 클레의 그림일 것이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나도 그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리고 내게는 없는 그의 음악적 소양이 부럽기만 하다.
클레의 그림을 볼 때면 장욱진 화백이 생각난다. 두 사람에게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크기가 큰 대작보다는 작은 작품(소작)을 많이 그렸다. 둘째, 완전한 추상보다는 반 추상화를 주로 그렸다. 셋째, 아동이 그린 것처럼 편안하고 몽환적인 색을 사용했다. 특히 자연에 실재하는 것을 화폭에 옮기되, 보이지 않는 기운까지 담기 위해 노력하는 나의 그림과는 달리, 추상화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고, 자연보다는 인간 중심적인 면을 추구하며, 없는 기운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정반대의 미학을 느끼게 된다.
이후 나의 시선은 브라크와 피카소의 작품으로 향했다. 이들은 동시대에 살면서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어졌던 원근법과 3차원 공간의 표현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큐브(Cube) 적 표현을 통해 입체파의 선구자가 되었고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 입체파 형제라 불리는 두 화가의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차이점을 찾고자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크게 다른 점은 찾지 못했다. 다만, 피카소의 그림이 조금 더 사물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 정도였다.
오늘이 지나면 언제 또 이런 거장의 작품을 다시 보게 될지 몰라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몇 번이고 천천히 모든 그림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늘 새로운 스타일로 변신하는 피카소, 음악적 감성이 풍부한 클레, 회화는 물론 조각과 도예까지 넘나들며 창작한 미로, 시대를 앞선 추상회화의 선구자 칸딘스키 등, 쟁쟁한 천재들의 혼이 서린 작품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갑자기 나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졌다.
사실 내가 미대에 간 것은 예술혼을 불사르기 위함이 아니라 집안의 장남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돈을 벌기 위해 그림 그리는 기술을 익히고 미술 교사라는 직업을 갖는 것이 삶의 목표였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미술 교사가 되고 나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꾸준히 붓을 놓지 않고 매일 그림을 그려왔다. 여기 대가들처럼 오로지 예술을 위해 일생을 바치지는 못했지만 편안하게 살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큰 탈 없이 지내는 우리 가족을 보며 나름대로 괜찮은 삶이었다고 스스로 위안할 뿐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박물관 밖으로 나온 나는 근처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서 따끈한 수프와 밥을 시켰다. 그런데 서빙하는 종업원이 음식이 담긴 접시를 앞에 놓다가 수프를 제법 많이 흘리고 말았다. ‘Be Careful.’이라고 했더니, 나를 말없이 흘깃 쳐다보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행여나 수프를 더 가져오는 줄 알고 내심 기다렸건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분이 언짢아서 팁을 최소한으로 주고 나왔다.
레스토랑 주변의 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오던 중 일본어로 된 종이가 많이 붙어있는 편의점에 들러 과일 컵과 소시지 1개를 사 먹었다. 체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아서 비타민과 단백질을 억지로라도 보충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다시 들어가서 위층에 진열된 악기 유물을 감상한 다음 무기 관으로 갔다. 중세 시대 기사의 갑옷과 각종 전투용 무기가 전시되어 있었고 옆 방에는 일본 사무라이의 갑옷과 무기도 꽤 큰 규모로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왔을 때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한국관을 가지 못해 아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은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럴 수가. 안내 지도를 숙소에 놓고 와 버린 것이 아닌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새 안내 지도와 한국관을 찾아보았으나 결국 어느 것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별수 없이 아쉬움을 남긴 채 미술관을 나와서 주변 동네를 구경했다. 요즘이 핼러윈 주간이라 그런지 집 앞에는 각종 유령, 귀신, 마녀, 해골, 거미줄, 그리고 얼굴 모양으로 파낸 호박 등으로 현관 앞을 장식한 집이 많았다.
마을을 둘러본 후 큰길로 나와서 노란색 택시를 불러 세웠다. 희재가 적어준 우리 숙소 주소를 기사에게 보여주며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백미러에 비친 택시 기사의 하얀 콧수염과 턱수염이 제법 멋졌다. ‘당신의 은빛 수염이 마치 헤밍웨이의 수염처럼 눈부시게 빛난다’고 했더니, ‘Thank you!’ 하면서 좋아했다.
여기까지는 다 좋았건만, 한참을 가다 보니 거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아서 택시기사에게 주소를 다시 확인했지만, 틀림없이 맞는다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택시 기사가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내리라고 했다. 내리고 보니 길옆에는 허드슨강이 흐르고 있는데 난생처음 보는 곳이었다. 무척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다. 택시 기사가 고의로 나를 잘못 내려 줄 리는 없고,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희재에게 전화하려 해도 내 핸드폰은 로밍이 되어 있지 않아서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이러다 국제미아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곧 ‘침착해야 한다’, ‘냉정해져야 한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파출소를 찾아가서 도움을 받기로 마음먹고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길 건너편에 형광등을 환하게 켠 핸드폰 대리점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저곳에 가면 일이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곧바로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가서 가장 친절해 보이는 여자 직원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지금 길을 잃었어요. 당신의 전화를 써도 될까요?’라고 양해를 구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흔쾌히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희재에게 냉큼 전화를 걸어서 숙소 주소지가 잘못된 것 같다고, 지금 이상한 동네에 와 있다고 했더니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일단 전화를 끊고, 5분 뒤에 다시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 말대로 했더니, 희재가 다른 주소를 알려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처음에 숙소 주소인 줄 알았던 곳은 이 숙소를 운영하는 회사의 사무실 주소였다. 뭐가 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아마 정식 호텔이 아닌 데서 벌어진 착오 같았다.
어찌 됐든 일이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었다. 진짜 주소를 메모하고 핸드폰 매장을 나오면서, 도움을 주었던 직원에게 ‘당신의 친절에 정말 감사하다’고 하며 전화비를 주려 했으나 한사코 받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지하철역이 있으니 타고 가라고 다정하게 알려주었다. 지하철이 익숙하지 않아서 택시를 탈 것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매장을 나가서 큰길을 건너면 약간 위쪽에 그쪽 방향으로 가는 택시가 많다고 손짓, 발짓으로 알려줬다.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하고 그녀가 알려준 장소로 가서 택시를 잡았다. 차가 출발할 때 무심코 밖을 내다보니, 이럴 수가! 아까 그 매장 직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걱정되었는지 나도 모르게 내 뒤를 따라 나와 차를 타는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매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아.. 이 삭막한 뉴욕의 대도시에 나처럼(?) 착한 사람이 있다니! 따스한 미소를 지닌 그 직원은 나를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임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숙소에 무사히 도착한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하늘의 도우심에 감사하며 잠시 쉬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6시쯤 밖으로 나섰다. 숙소에서 약 2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Good food’라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넓진 않았지만 제법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마음에 들었다. 카운터에 앉아있는 쾌활한 종업원에게 야채로 된 음식과 뜨거운 물을 주문했다.
뉴욕의 식당을 돌아다니다 보니, 종업원은 대체로 두 종류였다. 주문을 받고 계산하는 사람과, 테이블을 닦고 음식을 나르고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전자는 비교적 다양했지만, 후자는 히스패닉이 대부분이었다. 인종으로 직종을 나누지는 않았겠지만, 대부분의 식당에서 이러한 법칙이 적용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식당 종업원이 친절하고 음식 또한 맛있어서 팁을 넉넉히 지불하고 나왔다. 거리를 산책하다가 들어와서 잠시 쉬고 있으니 희재가 곧 들어왔다. 내가 오늘 길을 잃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이야기하며, 친절한 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국제 미아가 되어서 너를 영영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얘기를 들은 희재는 미안해하면서도, 낯선 거리에 뚝 떨어졌는데 큰 탈 없이 숙소로 돌아온 나를 퍽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위로인지 농담인지 모를 생뚱맞은 말 한마디. “음, 역시 월남전 용사는 다르시군요!” 나한테는 50년 전 이야기 좀 하지 말라면서 지가 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