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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Oct 18. 2021

칠순의 저승사자

2018. 10. 31. 열째 날

 오전에는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 후, 오후에는 얼음공주(Frozen) 공연을 관람하고, 저녁때는 뉴욕의 유명한 축제인 핼러윈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것이 오늘의 계획이었다.


 얼음공주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로, 올해 봄부터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다. 희재의 조언대로 한국에서 미리 애니메이션을 보고 왔더니 공연의 흐름을 쉽게 따라갈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며칠 전에 본 라이언킹과 비교하면서 감상했는데, 아마도 전체적인 스타일이 정반대여서인 것 같았다. 라이언킹이 웅장하고 역동적이면서도 아날로그적이라고 한다면, 얼음공주는 차분하면서도 첨단 기술을 십분 활용한 현대적인 느낌이었다.


 라이언킹의 의상은 다소 투박하고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계 장치로 만들어진 반면, 얼음 공주의 의상은 매우 미려하고 섬세했다. 배경을 표현하는 방법도 달랐다. 종이와 나무, 동물 모형 등으로 무대를 꾸민 라이언킹과 달리, 얼음 공주는 현란한 조명과 스크린에 투사하는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배경을 표현했다. 한마디로 라이언킹이 장중하고 화려한 바로크 시대의 작품이라면, 얼음공주는 가볍고 세밀한 로코코 시대의 작품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뮤지컬 관람이 끝나고 숙소로 와서 잠시 쉬었다가, 뉴욕 시내 한복판에서 하는 핼러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분장을 시작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저승사자였다. 물감으로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입술을 붉은색으로 두껍게 과장하여 그린 후, 희재가 준비한 검은색 두루마기와 갓을 쓰니 영락없는 저승사자로 변신했다.


 희재는 처녀 귀신이었다. 얼굴을 나보다 더 새하얗게 칠하고 눈가와 입가에 붉게 흐르는 피를 그린 뒤, 긴 가발을 쓰고 흰색 소복을 입자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분장을 마친 우리는 지정된 행사장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지하철을 탔다. 뉴욕 시민들이 힐끔힐끔 쳐다봤고, 때로는 사진을 같이 찍자고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한국 귀신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집결지에 도착하니 독특한 분장을 한 많은 인파가 모여있었다. 한국인 청년도 가끔 눈에 띄었다. 퍼레이드 출발 시간이 되자 귀신, 해골, 원더우먼, 악마, 본드걸, 심지어는 자기 키를 넘어서는 공룡으로 분장한 참가자들이 행진을 시작했다. 온갖 귀신이 무덤에서 살아온 듯 하늘에서 날아온 듯 여기에 다 모인 것 같았다.


 핼러윈 퍼레이드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행렬이 시작하는 집결지로 가서 출발해야 한다. 행렬 가장자리, 그러니까 울타리 바깥의 인도에서 구경하다가 중간에 끼어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퍼레이드가 시작하는 곳에서부터 끝나는 곳까지 경찰이 울타리와 Police Line을 쳐놓고 구경꾼이 중간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강력히 통제 중이었다. 퍼레이드는 흥겹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지만 무서운 표정으로 허리에 총을 찬 경찰과 경찰차를 볼 때마다 역시 보안과 안전을 각별히 신경 쓰는 미국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형 트럭이나 지붕이 없는 승용차도 축제에 동원됐다. 차 위에서는 밴드팀이 신나게 곡을 연주했고 댄서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며, 참가자들은 마음껏 몸을 흔들기도 하고, 맘에 드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다 같이 춤을 추기도 했다. 중간마다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춤을 추는 팀도 보였는데, 흥을 돋우기 위해 투입된 전문 댄서들 같았다. 그야말로 모두가 모여서 함께 즐기는 흥겨운 축제의 장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 한편에 인파가 몰려 있었다. 분장에 자신 있는 사람이 뉴욕 방송국에서 마련한 무대에 오르면 미국 전역으로 방영하는 행사를 진행 중이었다. 우리도 빠질 수 없어서 무대로 가서 섰다. 내가 멋지게 귀신 포즈를 취했더니 앞에서 촬영하던 사람이 씩 웃었다.



 멋진 분장을 한 사람이나 팀을 만나면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우리는 여러 번 사진을 같이 찍자는 요청을 받았다. 그중에는 고국의 귀신 복장을 알아본 한국 유학생도 꽤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한국어로 인사를 나누었고, 희재는 그들에게 연신 주먹을 흔들며 화이팅을 외쳐 주었다. 타지에서 고생이 많은데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 같았다.


 모든 행사가 끝난 후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같이 사진을 찍자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나보다는 희재에게 그러한 요청을 더 많이 했다. 내 딸이 한국에서도 예쁘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더 예뻐 보이나보다.


 분장을 지우고 잠시 쉬다가 새벽 1시쯤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핼러윈 퍼레이드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희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덕분에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딸과 함께 귀신 분장을 하고 찍은 사진을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보내주었더니, 부럽다는 말과 더불어 멋있다는 답장이 쏟아졌다. 딸 덕분에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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