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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Oct 17. 2021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미안하다

2018. 10. 30. 아홉째 날

 웬일인지 평소와 달리 새벽 2시경에 눈이 번쩍 떠졌다. 다시 잠을 청했으나 쉽게 잠이 오질 않아 여행 일지를 끄적이며 뒤척이다가 날을 새 버렸다.


 낮에는 첼시 마을에 갔다가 저녁때는 록펠러 센터의 관망대에, 밤에는 재즈바에 갈 예정이었다. 여유 있게 아침을 먹고 10시 반쯤 숙소를 나섰는데 오늘따라 너무 일찍 깨서 그런지 몸이 상당히 무거웠다. 희재에게 피곤하다고 하면 걱정할 것 같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첼시는 뉴욕 도시가 형성되던 초창기에 조성된 오래된 마을로 한동안 낙후된 채 버려져 있었지만, 예술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그중 대표적인 공간을 뽑자면 The High Line(하이 라인)이라고 부르는 철로 공원과 첼시 마켓, 그리고 예술 마을(미술관 거리)일 것이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14번가에서 내려 하이 라인으로 가는 길에 있는 첼시 마켓부터 가 보았다. 외양이 상상했던 것보다 많이 낡아 보여서 희재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원래는 과자 공장으로 쓰던 건물로 그때가 자그마치 120년 전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30년만 지나도 노후 건물로 분류하는 마당에 120년이라니! 미국인들의 실용 정신에 혀를 내둘렀다.


 얼핏 본 첼시마켓의 겉모습은 마치 일제 강점기 때 독립투사를 가두었던 서대문 형무소와 비슷해 보였다. 붉은 벽돌은 곧 교도소 담벼락이라는 잠재의식 때문인 것 같았다. 다소 살벌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막상 마켓 안에 들어가 보니 활기가 넘쳤다. 내부는 현대적이고 효율적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신구 세대를 넘나드는 독특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공장으로 운영할 때 사용했던 기계 부속품, 나사, 핸들 등을 실내 장식으로 재활용하였고, 높은 천장을 가로지르는 수도관도 그 자리에 그냥 두어 빈티지한 멋을 내었다. 이렇게 옛것을 모두 부수지 않고 남긴 것은 실용 정신이 강한 이유도 있겠지만, 미국의 역사가 짧은 탓에 세월의 흔적을 오래도록 남기려는 사고방식이 깊이 박혀 있는 것 같았다.


 통로 한쪽에는 성인 4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돌로 된 소파가 있었다. 대리석을 통째로 써서 정교하게 깎아 놓았는데, 굳은 돌(硬)과 부드러운 소파(柔)의 언발란스한 매치가 재미있었다. 가족 또는 단체 관광객들이 소파에 앉아서 즐겁게 기념사진을 찍고 있길래 나도 한 장 찍었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다 보니 왠지 마켓의 분위기가 이상야릇한 것이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아! 핼러윈 소품 때문이었다. 각 상점의 입구는 물론이고 빈 공간과 통로, 천장 등 눈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기괴한 귀신, 악마, 마녀, 괴물 모형 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양팔을 묶고 머리에는 전기 고문기를 씌운 인형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1818년에 발표된 괴기 고전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과 흡사했다. 그 밖에도 피눈물을 흘리면서 천장에 매달린 그네를 타는 여자아이 인형, 쇠사슬에 매달려 덜렁거리는 잘린 팔과 다리, 거꾸로 매달린 시체, 해골바가지 등.. 요즘이 핼러윈 축제 주간이라, 그에 맞는 분위기를 내기 위해 내부를 장식한 것 같았으나 솔직히 내 정서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우리나라의 단오제나 대보름 같은 아름답고 고상한 전통문화가 좋다.


 


여러 상점을 둘러본 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해산물 식당에서 랍스터를 먹었다. 수프와 맥주도 함께 곁들이니 궁합도 잘 맞고 매우 맛있었다. 뉴욕에 와서 먹은 음식 중 스테이크에 이어 두 번째로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한국에서는 스테이크나 랍스터를 자주 먹을 기회가 없었는데, 뉴욕에 오니 특별식을 자주 먹는다.


 첼시 마켓에서 나와서 조금 걷다 보니 하이 라인 공원이 등장했다. 원래 이곳은 뉴욕을 개척하던 1900년대 초반 화물 열차용 고가 철도로 사용되다가 버려졌고, 1980년도에 공중 공원으로 새롭게 꾸며지면서 세간의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국의 서울역 앞 고가도로(현재의 ‘서울로’)를 리모델링할 때 이 공원을 벤치마킹 했다고 한다.


 실제로 와서 보니 예전에 사용했던 철도 레일 뿐 아니라 높낮이가 다른 지형지물을 최대한 살려서 계단과 돌, 나무 등을 자연스럽게 채워 넣었으며, 벽화나 조각 작품 등을 곳곳에 설치하여 세련된 멋을 더하고 있었다. 공원이라기보다는 뉴욕시가 내려다보이는 쾌적한 산책로 같았고, 바쁜 도심에 사는 뉴요커들의 편안한 쉼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첼시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는 예술 마을이었다. 예술 마을은 맨해튼 10, 11 애비뉴의 19번가에서 27번가까지의 골목에 크고 작은 갤러리들이 모여있는 동네를 일컫는다. 첼시마켓처럼 옛 건물을 리모델링하거나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는 곳이 많으며, 80여 개의 크고 작은 전시장이 모여 있어 마치 한국의 인사동 거리 같은 분위기였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과 최신 현대 미술 사조를 엿볼 수 있으므로, 예술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필수로 방문하는 코스라고 한다.


 전시된 작품들을 보니 세상에 없던 아이디어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펼치려 애쓰는 신진 작가들의 치열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드로잉 하나를 보더라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하여 표현하였고 특히 빛(조명)을 이용한 설치 작품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예술가는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존재들이다. 창작의 쓰디쓴 고통이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또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 일이므로 내 딸만은 그러한 길을 가지 않길 바랐다.


"희재야, 내가 너한테 '굳이' 미대를 가야겠냐고 했던 거 기억나냐?"

"당연히 기억나죠.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라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환쟁이' 취급을 하기 일쑤니까 그림은 그냥 취미로 그리라고 하셨잖아요."

"근데 왜 갔냐?"

"아빠가 미술 학원 보냈잖아요!"

"그건 그냥 취미로.."

"여하튼, 저는 디자인과를 나왔으니까 순수 미술을 전공한 건 아니죠. 저는 아빠랑 아빠 친구분들 보면서 제가 화가감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의 열정은 없는 것 같아서. 그래도 이왕이면 잘하고 좋아하는 일로 돈 벌고 싶기도 했고, 기술 하나 배워두면 평생 써먹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디자인과에 간 거고,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 뭐."

"그래. 네가 괜한 고생 안 했으면 하는 마음에 미대 가는 걸 반기진 않았었는데, 가장 중요한 건,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한다는 거야."

"근데, 좋아하던 일도 돈벌이가 되면 싫어지는 것 같아."

"그래서 '진짜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것, 내 평생을 걸 만큼 좋아하는 것."

" 아직 내가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열심히 찾다 보면 언젠간 나타날 거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곳저곳 둘러보던 중, 아름다운 천연 원석을 멋스럽게 가공하여 전시해 놓은 쇼윈도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홀린 듯 들어간 갤러리 내부는 온갖 종류의 보석으로 가득했다. 많은 작품 중 특히 빨갛고 귀여운 매력으로 유혹하는 작품 하나에 시선이 갔다. 그것은 장미색처럼 붉은 천연석을 깎아서 먹기 좋게 잘라놓은 묵(젤리) 같은 컨셉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분명히 돌인데 어찌나 그토록 먹음직스럽게 만들었는지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아까 첼시 마켓에서 본 돌 소파처럼, 상반되는 질감을 섞어놓은 사물은 그 이질감만으로도 작품이 된다.


 

 한국의 두산 기업에서 운영하는 ‘두산 갤러리’에서 국내의 우수한 작가들을 소개 중이라 하여 가려 했지만 아쉽게도 가지 못했다. 일찍 일어난 탓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인지, 점심때 먹었던 맥주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더 심하게 자꾸 화장실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내어주는 갤러리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근처의 갤러리 몇 군데만 빠르게 둘러보고 첼시마켓으로 급하게 돌아갔다. 용변을 본 후,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져서 샌드위치 빵과 수프만 사서 숙소로 다시 올 수밖에 없었다. 희재는 모처럼 첼시까지 와서 많은 작품을 못 보고 가는 것이 아쉽고 속상해 보였다. 그런 희재를 지켜보는 나도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빠르게 체력을 회복하는 일 말고는 없어 보였다.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첼시 갤러리를 충분히 관람하지 못한 미련을 빵과 함께 가까스로 씹어 넘겼다. 간단히 요기한 후, 록펠러 센터 전망대인 탑 오브 더 락(Top of the Rock)으로 향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 록펠러 센터의 탑 오브 더 락, 그리고 원 월드 전망대가 뉴욕의 대표적인 3대 전망대이다. 이 중 희재는 뉴욕의 전경을 360도로 볼 수 있는 탑 오브 더 락을 예약했다. 여기서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크라이슬러 빌딩, 타임스퀘어, 그리고 멀리 센트럴 파크 공원까지 뉴욕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를 골고루 관망할 수 있다. 저녁 5시에서 5시 30분 사이에 입장객이 가장 많은데, 주간, 일몰, 야간의 풍경을 모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5시쯤으로, 이르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미 줄이 50m 정도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빌딩 현관에 들어섰더니, 대형 전광판에서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록펠러 재단을 홍보 중이었다. 벽에는 록펠러 빌딩 건설 당시 현장의 노동자들을 찍은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100m가 넘을듯한 공중에 붕 떠 있는 철제 빔(Beam)에 여러 명의 사람이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나, 빔 위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찔한 모습을 보니 당시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전망대로 가려면 1층 현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70층까지 올라가야 한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제복을 입은 직원 두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근무 태도가 몹시 불량해서 눈에 거슬렸다. 마치 관광객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일하는 중에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몸을 흐느적거리며 큰 소리로 낄낄거리면서 수다를 떨어댔다. 이 사태에 대해 희재의 의견을 물으니, 뉴욕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미국의 개인주의 문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누가 나서서 그러한 태도를 지적하거나 나무라는 일은 거의 없다고도 했다. 혹여라도 훈장 선생님처럼 한마디 하실 요량이라면, 그 마음 고이 접어서 가방에 넣어두시라는 경고의 말도 덧붙였다. 우리나라는 근로자들이 너무 착해서 문제라면 문젠데, 미국은 분위기가 많이 다른가 보다.


 마침내 70층 전망대의 맨 꼭대기 층에 올라섰다. 때마침 허드슨강 하늘 위로 황혼이 물들기 시작했다. 석양을 배경으로 천사들이 날아들 듯한 황홀한 분위기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머리 위가 붉게 타들어 가는 것도 잠시, 어둠이 소리 없이 내리기 시작하자, 거대한 장승처럼 서 있던 빌딩에 하나둘씩 불이 켜졌다. 낮에 보았던 딱딱하고 건조한 콘크리트 건물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새까만 어둠 속에서 네모난 빛의 큐브만 반짝거렸다. 부드럽고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특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 같았다. 맨 꼭대기의 첨탑에 에메랄드빛 조명이 켜지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붉은색으로 바뀌는데, 건물 전체가 하나의 보석처럼 은은히 빛났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관광객이 전망대에 엄청나게 몰려들어서 사진을 찍기가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마천루나 크라이슬러 빌딩을 비롯한 뉴욕의 대표적인 건물을 배경으로 우리는 열심히 기념 촬영을 했다.


 희재는 이곳에서 오랜 시간 야경을 보며 즐기고 싶어 했지만, 체력이 바닥난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 번 고갈된 에너지는 좀처럼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오늘 밤 9시 30분에 예약해 놓은 재즈 음악 감상실에 가려 했건만, 도무지 몸을 일으킬 수 없어서 희재 혼자 가기로 했다.


 동행인 없이 혼자 밤늦게 시내에 나가는 딸의 안전이 걱정되었으나,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제는 내가 아닌 딸을 위해서라도 컨디션 관리를 잘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잠도, 아쉽지만 반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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