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덴티티, 진정성 그리고 크래프트 맥주
신당동이 핫하다. 떡볶이 때문은 아니다. 물론 신당동 떡볶이 타운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으로 미어터진다. 주목받는 곳은 떡볶이 타운 길 건너다. 중고 기물 가게, 오래된 쌀집, 작은 슈퍼 등 80년 대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동네다. 요즘 힙당동으로 불리고 있다.
간판과 새시, 벽돌로 쌓은 외벽에는 옛 흔적이 남아있지만 가게 이름은 사뭇 생경하다. 핍스 마트, 아포테 커리, 브릭레인 버거, 주신당, 짐빠 신당, 신당동 것이 아닌 거 같다. 쌀집인 줄 알았는데 치킨을 튀기고, 양곡 창고 같은데 커피를 내리며 가게에서는 힙한 옷들을 팔고 있다.
신당(新堂)동은 조선 시대부터 신당(神堂)골로 불렸다. 전쟁으로 죽은 이들이 넋을 기리기 위한 무당집들이 많았다고 한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귀신 신(神)이 새 신(新)으로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울중앙시장을 중심으로 쌀가게들이 들어섰고 해방 후 전국에서 가장 활발한 양곡 유통 시장이 됐다.
핫플 신당동에서 관심 가는 곳은 주신당이라는 술집이다. 곧 무너질 듯한 지붕과 덕지덕지 붙어있는 부적 그리고 문을 막고 있는 토끼 신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본 것 같은 신당을 연상케 한다. 외관과 달리 안으로 들어가면 알록달록한 조명 아래 젊은이들이 빼곡히 앉아 칵테일과 위스키를 즐기고 있다.
주신당은 신당동의 유래를 매장 정체성으로 잘 녹여낸 경우다. 가게 콘셉트가 자연스럽게 동네 이름과 연결되어 부가적인 설명이 불필요하다. 사람들은 신당골의 판타지를 느끼며 공간을 소비한다. 신당동에 생긴 다른 매장들도 마찬가지다. 원래 있던 양곡 창고, 쌀집, 동네슈퍼 외관과 이미지를 유지하며 알맹이만 바꿨다. 소비자들은 공간이 건네는 역사와 문화를 개별적인 콘텐츠 속에서 이해한다.
신당동과 환경은 다르지만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북촌 재동 초등학교 건너 평범한 건물 1층에 있는 런던 베이글 뮤지엄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은 원래 분식집이었다. 문 앞에는 새벽부터 베이글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내부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부터 영국 국기, 빨간 이층 버스로 도배되었고 유럽 빈티지 냄새가 풍기는 의자 테이블이 놓여 있다. 몇 년 전 뜬금없이 베이글 가게가 생겼을 때 살짝 의아했다. 과연 여기에 베이글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까?
맥주를 마시러 영국 현지 펍을 가봤지만 런던 베이글 뮤지엄 같은 인테리어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가구도 영국 스타일이 아닌 유럽식 짬뽕 스타일이 아닌가. 게다가 베이글은 뉴욕이 본진이다.
그러나 이곳은 예상을 깨고 순식간에 핫플로 떠올랐다. 오픈런이 일상화 됐다. 사람들은 런던에 없는 베이글에 환호했다. 베이글 보다 런던에 대한 판타지를 소비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영국을 연상하게 하는 공간이 있었다. 비록 런던에서 절대 볼 수 없는 스타일이지만.
공간이 콘텐츠만큼 중요해졌다. 여러 요소들이 영향을 끼쳤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스마트 폰 덕분에 사진 촬영이 쉬워졌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삶을 공유하고 표현하는 문화도 정착했다.
과거에는 무엇을 하는지가 주요 콘텐츠였다면 요즘에는 어디에 머무는지가 중요하다. 이렇게 공간을 소비하고 표현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스페이스(space)와 정체성(identity)을 합쳐 스페이스덴티티(spacedentity), 공간정체성이라고 한다.
공간정체성의 소극적 형태는 팝업 스토어다. 브랜드, 캐릭터, 아티스트 팝업 스토어는 취향과 관심이 비슷한 소비자들의 놀이터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한정판 굿즈를 구매하거나 사진을 찍어 소셜 미디어에 올린다. 가장 적극적 형태는 거주 공간을 공유하는 행동이다. 자신의 개성과 취향에 맞춰 꾸민 집이나 방을 대중에게 공개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수년 전부터 공간정체성은 중요한 트렌드로 떠올랐다.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들이 인정되고 과거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세대들이 등장하며 자신을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이들에게 공간은 사진과 영상으로 직접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매개다. 복잡한 설명 없이 개성과 차별성을 시각적,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비즈니스에서 공간정체성은 중요하다. 소비자는 정체성이 투영된 공간에서 가성비의 벽을 무너뜨린다. 가치소비가 이루어지면 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다. 팝업 스토어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음반이나 캐릭터를 구매하거나 취향이 맞는 카페에서 한 잔에 만 원짜리 커피를 소비하는 건, 과소비가 아니라 가치소비다.
공간(place)의 제약도 사라진다. 예전에 매장 위치 중 1 급지는 유동 인구가 많은 대로변이었다. 당연히 임대료와 관리비가 비싸고 큰 투자 위험이 수반됐다. 그러나 공간정체성이 뚜렷하면 골목길 2층이나 한적한 시외 길가에 매장을 오픈해도 운영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를 보고 가고 싶은 곳을 어떻게든 찾아간다. 게다가 그 과정을 탐험과 모험의 과정으로 생각한다.
자연스레 그 속에서 작은 브랜드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자금이 부족하지만 뚜렷한 개성과 아이디어를 상품화할 수 있다면 공간(place)적 제약은 사라진다. 신당동의 작은 매장과 식당들이 생존하고 있는 이유다. 런던에 없는 인테리어를 가진 런던 베이글 뮤지엄이 오픈런의 성지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젊은 세대들의 트렌드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사실 소셜 미디어에 익숙하다면 나이와 세대라는 가림 막은 사라진다. 작은 브랜드가 살아남고 이어가기 위해서는 공간정체성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
여행 트렌드도 변했다. 예전 여행을 계획할 때는 랜드 마크나 관광지를 정하고 숙소를 정했지만 요즘에는 먼저 숙소를 정하고 주위를 탐험하듯 여행한다. 어떤 숙소에서 머물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호텔에 머물며 힐링하는 호캉스도 테마에 따라 다양해지고 있다. 고객은 자신의 감성과 취향으로 꾸민 호텔 룸에 기꺼이 거금을 투자한다.
레트로는 복고적인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감성을 제품이나 공간에 표현하고 드러낸 것이다. 제임스 길모어와 조지프 파인 2세는 <진정성의 힘>에서 레트로 제품을 과거의 디자인을 소환한, 독창적인 제품이라고 설명한다. 옛날 감성을 입힌 것뿐이다. 충분히 더 독창적일 수 있다. 빈티지 옷은 실제 입어서 낡은 것이 아니라, 낡게 보이는 새 옷인 것이다.
비근한 예로 곰표 밀맥주가 있다. 곰표라는 빈티지 브랜드를 끌어와 맥주에 붙였다. 동대문 경동 시장에 오픈한 스타벅스 경성 1960은 레트로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매장이다. 오래돼 보이는 인테리어는 모두 꾸민 것이다. 경성에는 이런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마치 원래 있었던 것처럼 표현했다.
요즘에는 삼겹살과 대창집 프랜차이즈가 레트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럴듯한, 존재했을 것 같은 인테리어로 마치 70, 80년대 원통 테이블에서 냉동 삼겹살을 굽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레트로는 과거 감성을 어필하고 고객들은 판타지를 소비한다.
반면 레프로는 재현된 것(reproduction)을 의미한다. 외관은 오리지널과 똑같지만 알맹이는 완전 다르다. 콘텐츠가 다를 수도 있고 인테리어 또는 메커니즘이 다를 수도 있다. 구형 자동차의 외관은 그대로 두되, 엔진을 최신형으로 바꾼다든지, 시계 껍데기는 원형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스템을 적용한다든지, 라면이나 과자 봉지를 오리지널로 복원하는 예가 레프로다.
앞서 소개한 신당동의 작은 가게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쌀집, 양곡 창고, 슈퍼의 외형을 그대로 사용하되 내부는 카페, 치킨 집, 국수 가게로 바꾼 경우다. 레프로 매장에서는 오리지널에 대한 진정성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수십 년 존재했던 감성과 힘을 배경으로 현대적 콘텐츠를 즐긴다.
레트로와 레프로는 공간정체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수단 혹은 방향성이다. 고객들이 자기 정체성과 공간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과정 중심에는 진정성(authenticity)이 있다. 아무리 멋진 인테리어와 감성으로 무장했다 하더라도 진정성이 전달되지 않으면 소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제주 맥주가 매각됐다. 한 때 잘 나가던 수제맥주가 순식간에 몰락하고 있다. 레트로 맥주의 대표 주자, 곰표 밀맥주도 힘을 잃었다. 진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레트로든 레프로든 진정성이 공감으로 이어지면 열성 팬이 생기고 지속적인 교류가 발생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시적 트렌드에 머물 뿐이다.
21세기 들어 모든 브랜드가 진정성을 주장한다. 리얼(real), 어쎈틱(authentic), 원조, 오리지널, 진짜 같은 단어가 붙은 제품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비즈니스에서 진정성이란 무엇일까? 진정성은 가식적이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대량생산 시대는 가격과 품질이 중요했다. 이 시대가 막을 내리며 사람들은 가치에 기준을 둔 소비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브랜드와 상품이 나에게 ‘진실한’지가 중요해졌다. 가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제임스 길모어는 <진정성의 힘>에서 진정성을 교감적 동요를 일으키는 세계관 또는 정체성으로 정의했다. 사람들은 자아를 브랜드에 투영하면서 교감을 할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에 진정성 있다고 느낀다. 즉, 자신의 세계관과 정체성에 부합하는 상품을 찾고 소비한다는 것이다. 진정성은 정체성을 드러내는 매개체다.
한때 협업으로 편의점 매대를 가득 메웠던 수제맥주들이 사라진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장수 브랜드를 맥주에 끌어와 짧은 시간 급격한 흥미를 일으켰으나 아쉽게도 진정성을 전달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수제맥주에서 대중맥주와 다른 것을 원한다. 풍성한 향미, 높은 품질, 힙한 라벨 그리고 브랜드 스토리까지 차별화된 가치가 맥주에서 드러나길 바랐지만, 실패했다.
내가 수년 전부터 수제맥주와 크래프트 맥주의 구분을 주장한 것도 여기에 근거한다. 예전 수제맥주는 소규모 맥주제조 면허로 작지만 개성 넘치며 양조사의 스토리가 묻어있는 맥주로 인식됐다. 허나 편의점 4캔 만원 맥주로 소비되며 이런 가치가 훼손됐다. 진정성을 교감하지 못한 소비자는 결국 수제맥주에서 멀어졌다.
크래프트 맥주는 여전히 소규모 맥주 면허를 가지고 작은 규모를 유지하며 개성이 담긴 맥주를 생산한다. 크래프트 맥주를 마시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런 진정성을 기대하고 가격을 조금 더 지불한다. 그 과정에서 교감이 일어난다면 진정한 팬이 될 수도 있다.
교감은 다양한 가치에서 일어난다. 지역, 배경, 스토리, 재료 등 공감 포인트는 철저히 개별적이라 통일될 수 없다. 이때 필요한 핵심적인 요소가 체험이다. 크래프트 맥주는 대중 맥주처럼 광고 마케팅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가치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데, 바로 공간이다.
크래프트 맥주는 자신의 공간을 통해 정체성을 표출할 수 있다. 그리고 고객들은 체험을 통해 교감하고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공간정체성이 형성되면 고객은 단순한 관계를 넘어 지지자가 된다. 미국 크래프트 양조장도 직영 펍이나 브루펍을 운영하며 정체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진정성을 드러내는 공간정체성이 크래프트 맥주의 핵심이자 정답이다.
국내에도 공간으로 진정성을 교감하는 크래프트 맥주들이 있을까? 물론이다. 다음 편에서 다채로운 문화를 고수하는 크래프트 맥주 세계로 떠나보자. 렛츠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