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맥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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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브루클린 성수동 맥주 탐방기

과거와 현재가 만드는 성수동의 불협화음이 지속되길

by 윤한샘 Feb 09. 2025
(서울에) 아파트를 많이 지었지만 사이에 그런 공간들이 많이 남아 있잖아요. 이 공간이 문화적으로 어떤 공간인지를 지금 정의하고 있는 것 같아요....(도시 정체성을) 문화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우리가 실험실 같은 느낌?...자기네들이 역사책에서 읽었던 도시 문화가 정의되는 그 시기?...서울에 오면...재미있을 거 같아요.
<유튜브 셜록현준 중 조승연 작가>


사이버 펑크, 스태거를 나와 성수동 풍광을 바라보며 이 단어가 맴돌았다. 시골 읍내에서나 볼 법한 낮은 건물들과 허름한 간판, 붉은 벽돌의 빌라를 비추는 희미한 전등 뒤로 화려한 불빛을 촘촘히 내뿜고 있는 마천루의 모습은 초현실적이지만 익숙한 조화였다.


어릴 적 기억하는 성수동은 작은 공장들이 즐비한 어두운 공간이었다. 저녁이 되면 골목 사이를 비추는 노란 전등과 도시 위를 관통하며 덜컹덜컹 달리는 전철은 위압적이었다. 가끔 칠흑 같은 그곳을 걸으며 빨리 밝은 구의동 테크노마트가 나오길 바랐던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다.

성수동 풍광성수동 풍광

유튜브 '셜록현준'에 출연한 조승연 작가는 지금 서울에 오는 세계적인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20세기 초 뉴욕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까 추측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 형성하는 불협화음은 이미 성숙을 마친 미국과 유럽의 도시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책에서만 접했던 그것을 현재 서울에서 볼 수 있을 거라는 의미였다.


내가 성수동 밤거리에서 사이버펑크 도시를 떠올렸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상가와 빌라 뒤로 우뚝 솟아있는 고층 빌딩들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미래 도시와 흡사했다.


펍 크롤링 성지가 된 성수동


펍을 돌아다니며 맥주를 마시고 문화를 체험하는 행위를 펍 크롤링(Pub crawling)이라고 한다. 펍 크롤링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지역에 맥주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의미다. 여기서 문화란 김정운 교수가 저서 <에디톨로지>에서 언급한 ‘특정한 정서를 공유하는 방식’을 말한다.


펍 크롤링은 한정된 시간에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펍들이 공간적으로 밀집되어 있어야 한다. 더불어 맥주를 마시는 행위를 넘어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정체성과 문화도 존재해야 한다.


최근 성수동이 펍 크롤링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공간적 정서적으로 즐길만한 맥주 문화가  있다는 뜻이다. 성수동 이전 펍 크롤링으로 유명했던 곳은 신사동 가로수 길과 이태원 경리단 길이었다. 15년 전 신사동과 이태원은 작은 펍들이 각자의 개성을 내뿜는, 대한민국 맥주 문화의 두 축이었다.


가로수 브루잉, 밴드 오브 브루어스, 미켈러 바, 신사 퐁당, 펑키 탭 하우스, 크래프트 브로스는 강남 펍 크롤링을, 사계, 메이드인 퐁당, 사우어 퐁당, 파이루스, 더부스, 스킴 45, 맥파이는 이태원 펍 크롤링을 상징하는 펍들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이태원 사계지금은 사라진 이태원 사계

이런 펍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를 해석하고 전파하는 청년세대였다. 주위에는 작고 개성 있는 카페와 소호샵들이 공존했다. 이들은 기존의 공간을 재해석하고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며 상권을 형성했다. 하지만 신사동과 경리단길 모두 젠트리피케이션 이슈를 겪으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사라졌던 펍 크롤링 바람이 성수동을 중심으로 다시 불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성수동이 펍 크롤링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맥주 문화가 정착됐다는 뜻이기도 하고 더불어 과거 신사동과 이태원에서 경험했던 젠트리피케이션 경종이 울리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미 대기업 브랜드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성수동이 새로울 것 없는 관광지가 되었다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맥주 문화 관점에서는 아직 다채롭고 신선한 것들이 남아있다. 공간적으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문화적으로 관통하며 맥주로 공존하는 공간들이 숨 쉬고 있다.  


성수동으로 펍 크롤링 떠나기


성수동 상권은 뚝섬역과 성수역을 중심으로 나뉜다. 이 두 지역은 성격이 다르다. 성수역 주변이 거대 브랜드와 높은 지가를 자랑하는 곳이라면 뚝섬역 주변은 초기 성수역과 이태원처럼 소호와 작은 카페들이 이제 막 자리 잡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뚝섬역 주위는 작은 공장과 사무실 그리고 노포들이 있었다. 7번 출구에서 시작된 골목에는 오징어 불고기, 불고기 백반, 전주식 콩나물국밥처럼 지역 직장인을 위한 음식점들만 볼 수 있었다. 그나마 알려진 장소가 맥주 재료 판매하는 서울 홈브루와 맥주 양조 공방 브루 5150이 있었던 8번 출구 건너편 성수 고깃집 골목이었다.


저녁이면 어두컴컴했던 뚝섬역 골목에 지금은 소소하지만 밝은 불빛을 내는 카페와 이자카야, 프랜차이즈 맥주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낮은 임대료를 바탕으로 기존 공간을 재창조한 크래프트 펍들도 조금씩 눈에 띈다. 여기서부터 투어를 시작하려 한다. 뚝섬역부터 성수역까지 걸어가며 맥주 문화를 밝히고 있는 공간을 탐험해 보자.


야몽야몽 성수

야몽야몽 성수야몽야몽 성수

뚝섬역 7번 출구 골목, 과거 흔적을 간직한 이곳에 크래프트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작은 펍이 있다. 지하 노래방이 있는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야몽야몽은 국내외 크래프트 맥주와 간단한 음식을 팔고 있다. 매장에 들어서면 고양이 캐릭터가 먼저 맞아준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주황색 인테리어가 포인트. 화려하지 않지만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이 편안하다.

304브루어리 '고양이가 우주를 구한다'304브루어리 '고양이가 우주를 구한다'

이곳에서 고른 맥주는 서대문에 있는 브루어리 304의 ‘고양이가 우주를 구한다.’ 밝은 황금색에 불투명한 뉴잉글랜드 IPA 스타일인 이 맥주는 오렌지,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 향을 갖고 있다. 고양이가 우주를 구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창 밖 지붕 위에 있는 고양이들은 성수동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것은 변해도 터주대감 고양이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테니.


어메이징 브루잉 컴패니

어메이징 브루잉 컴패니어메이징 브루잉 컴패니

야몽야몽에서 10분 정도 성수역 방향으로 걸어가면 어메이징 브루잉 컴패니를 만날 수 있다. 어메이징은 성수동 맥주 씬의 선구자다. 2016년 경동 초등학교 앞에 들어설 당시만 해도 주위에 상업 시설을 찾기 힘들었다. 목공소였던 공간을 보존해 작은 양조장과 펍을 만든 이곳은 성수동 맥주 문화를 만들고 이어온 장본인이다.

그때 그IPA그때 그IPA

겨울이라 외부 공간은 개방하지 않지만 여름에는 야외에서 맥주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여기서 마신 맥주는 ‘그때 그 IPA’, 요즘은 쉽게 마시기 힘든 미국 웨스트 코스트 IPA다. 웨스트 코스트 IPA는 앰버에 가까운 색에 7% 이상의 알코올, 그 뒤에 높은 쓴맛과 진한 자몽 향이 숨어있는 맥주다. 한때 크래프트 맥주 씬을 이끌었으나 요즘은 부드럽고 향긋한 뉴잉글랜드 IPA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어메이징 ‘그때 그 IPA’ 라벨을 보면 수염 가득한 인물을 볼 수 있는데, 그가 이 맥주를 기획하고 만든 주인공이다. 만약 시크한 표정으로 자신이 만든 맥주를 무심코 던저주고 가는 털보 직원을 본다면 인사를 건네 보자. 기대치 않은 서비스를 줄지도 모르니까.


서울 브루어리 성수

서울 브루어리 성수서울 브루어리 성수

어메이징에서 나와 바로 앞 작은 골목으로 직진하면 성수동 핫플레이스 연무장길을 만날 수 있다. 소호였던 매장들은 이제 대기업 브랜드와 팝업 스토어로 바뀌었다. 작은 크래프트 펍은 이런 곳에 생존하기 힘들다. 하지만 성수동 중심에 맥주 문화를 뿌리내리려 작정하고 입성한 서울 브루어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서울 브루어리의 뿌리는 합정동이다. 2017년 구옥을 브루펍으로 바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힙한 인테리어와 코코넛과 유당을 넣은 IPA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23년 서울 브루어리는 성수동에 새로운 맥주 요새를 지었다. 총 7개 층으로 구성된 건물에는 브루어리, 카페, 펍, 공연장까지 브루펍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공간들이 빼곡하다.

페일 블루닷 IPA페일 블루닷 IPA

높은 층고에 모던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는 브루펍보다 레스토랑을 떠오르게 한다. 1층이 카페로 운영되고 있어 오롯이 맥주를 즐길 수 있는 곳은 2, 3층이다. 주문한 맥주는 서울 브루어리 시그니쳐 페일블루닷 IPA, 빛이 살짝 투과하는 황금색 IPA에는 분위기처럼 차분하고 기품 있는 향이 배어있었다.


스태거

스태거 내부스태거 내부

맥주도 몇 잔 마셨겠다, 서울 브루어리를 나와 조금 걸어보자. 남쪽으로 15분 정도 내려가면 연무장길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만날 수 있다. 아직 개발의 흔적이 묻어있지 않은 오리지널 성수 뒷골목, 작은 공업사, 창고, 슈퍼들이 낮은 건물 뒤에 남아있는, 그래서 크래프트 맥주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동네에 작은 펍, 스태거가 숨어있다.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간판이 없어 매장을 찾는 게 쉽지 않다. 특별한 인테리어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안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문으로 이곳이 맥주를 파는 공간임을 짐작할 뿐이다. ‘ㄴ’ 자 형태의 바 테이블에는 겨우 7개의 의자만 놓여있고 벽에는 손으로 쓴 맥주 메뉴가 있다. 심지어 안주는 외부에서 가져와도 된다.

공덕 미스터리 넬슨 소빈 더블IPA공덕 미스터리 넬슨 소빈 더블IPA

이곳에서 마신 맥주는 공덕에 있는 브루펍, 미스터리에서 만든 뉴잉글랜드 스타일 IPA ‘미스터리 넬슨소빈’, 오렌지 주스 같은 화사하고 달콤한 향미 뒤에 8%가 넘는 알코올이 묵직하고 진중하다. 안주는 바로 옆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 구매한 과자를 옆 사람과 나눠 먹는 모습이 여기서는 이상하지 않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젊은이들이 혼자 또는 둘이 들어온다. 화려한 성수동보다 맥주 한 잔을 두고 소박한 성수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성지처럼 보였다.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세대에게 모던함은 오히려 재미없다는 듯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와 불편한 의자를 즐기고 있었다.


문화적 다양성이 충만한 공간으로 지속되길


문 밖을 나서며 낮은 건물들 뒤로 초고층 빌딩이 함께 있는 조합을 계속 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키치함과 화려함, 양 극단을 모두 품고 있는 모습이 성수동의 매력이 아닐까. 우리는 이런 부조화의 매력을 즐기려고 골목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야생에 문화는 없다. 문화는 사람이 있어야 존재한다. 외형은 허름하지만 내면에 인간의 숨결이 아직 남아있는 성수동이 신사동과 이태원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작은 맥주 펍부터 고급스러운 펍이 공존하는 도시로 남아있기를. 다채로운 맥주로 문화적 다양성이 곳곳에 깃들어 있는 공간이 지속되길 바라며, 펍 크롤링을 떠나보자. 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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