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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우 Dec 03. 2018

남한산성스카이러닝 26km를 달리고

결국, 달리기와 산, 사람들은 ‘감사’로 이어진다.

로드를 뛰는 것보다, 산을 뛰는 걸 좋아한다. 아스팔트 위에서 뛸 때는 땅이 내 몸의 에너지를 흡수해가는 느낌이라면, 산에서 뛸 때는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산이 나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주는 느낌을 받는다. 로드에서는 사각형으로 여기저기 각이 있고 인위적으로 깔끔하게 꾸며진 빌딩들이 보인다면, 산에서는 둥글둥글하고 거칠고 날것의 생명들과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달리기 그 자체의 경험은 사랑하지만, '기록'과 '겨룸'을 위한 달리기는 좋아하지는 않아서, 대회를 자주 나가지 않는다. 나는 즐거우려고 나가도, '대회'라는 맥락에 들어가면 기록 욕심이 날 수밖에 없으니까.


트레일 러닝 대회는 지금까지 딱 두 번 나가 봤는데, 항상 알바가 문제였다. 생애 처음 나갔던 2014년에 청계산 트레일 러닝(대회 이름 기억나지 않음)에서는 알바를 1시간 넘게 했고, 올해 4월 제주도(Jeju Trail대회)에서도 알바를 한 40분 넘게 했다. 내가 경험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마킹이 좋지 않기도 했다. 특히 제주도 대회에서는 100여 명이 넘게 다 알바하고 코스가 뭔지 알 수 없어서 10분 넘게 다들 서서 터지지 않는 핸드폰을 들고 주최 측에 전화를 하기도 했다.


제주도 대회 이후 트레일 러닝 대회를 다시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굿러너스컴퍼니는 대회 운영을 정말 잘하고 마킹도 훌륭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다가,  집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에서 대회를 연다고 하여서, 남한산성스카이러닝 대회 26km를 신청했다.


남한산성스카이러닝 2018 대회 홈페이지 이미지. 출처: https://www.nhssskyrunning.com/


26km 대회 코스.  총 누적고도: 1,500m. 출처: https://www.nhssskyrunning.com/course


2018년 11월 11일.

수백 명의 산과 달리기를 사랑하는 분들과, 산을 달리면서 행복했다.


잊고 싶지 않아서, 달리면서 뭘 먹고 마셨는지, 어떻게 준비했는지 (그리 큰 준비는 하지 않았지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등을 정리해 봤다.

알바 (대회 주로가 아닌 다른 곳을 뛰면서 주로 이탈하는 것...)
힘들어도 고개는 들고뛰어야 된다.

정말.

땅만 보다가 알바하고 다시 트레일로 복귀하니 앞에 3명의 러너가 더 생겼다

대회 마킹은 정말 최고였다. 알바는 정말 내가 고개를 땅에 박고 뛰다가한 것.


먹은 것: 감  
트레일 러닝에 감이 최고인 듯.

맛도 좋고 소화를 촉진시키지도 않아서 트레일 러닝에 딱 적합하다 (화장실 갈 확률을 줄여준다). 감 하나 깎아서 반으로 나눠서 ziplock 봉지에 왼쪽 주머니, 오른쪽 주머니에 나눠 넣어 놓고 뛰면서 먹었다. 다음에는 2개 깎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꿀맛.

(그러고 보니... 글 표지 사진 턱에 묻어 있는 게 감 조각인 거 같다...?)


아, 대회 아침에는 바나나를 2개와 견과류를 한 줌 먹었다.


달리면서 마신 것: 꿀과 식초물 농축액 + 물
젤 같은 걸 먹어본 적이 없다. 대회 날에 그걸 실험하면 배가 깜짝 놀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에 즐겨 마시는 사과 식초와 꿀을 뜨거운 물에 많이 타서, 꿀+식초 ‘농축액’을 만들어 갖고 갔다. 농축액은 오른쪽 주머니에, 그리고 500ml 물병은 왼쪽 주머니에 넣어 놓고 달리면서, 20분마다 한 모금씩 마셨다. 아쉽게도 마지막 CP3 가기 전에 농축액은 다 마셔 버려서, CP3에서 이온음료를 한 컵 마셨다. 나중에는 농충액을 300ml 정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쥐가 나다
마지막 CP를 지나고, 5km가 남았을 때부터 쥐가 조금씩 났다. 소금과 이온, 당분이 부족했었던 것 같다. 젤을 먹던가, 꿀과 식초물 농충액에 소금도 타고, 그 양을 더 많이 준비해야 할 것 같다. 달리면서 '다리야, 다리야, 제발 완주 전까지만 참아줘라.' 하면서 달렸다.

페이스 조절
초반에 앞 러너 두 분이 CP1 들어가기 전부터 속도를 올려서 치고 나갔다. 나는 너무 이르다 생각해서 편한 속도를 유지했었다. 결승전까지 이 두 분을 보지 못했고, 경기 내내 거의 혼자 뛰었다. 좋게 보면 내 페이스 조절을 성공적으로 한 거고, 아쉽게 보면 너무 쉽게 포기한 것 같다. 다음에는 조금 무리하더라도 앞의 러너들을 따라가 봐야겠다 (그때는 오버페이스의 고통을 맛볼지도..).


비브람 트레일 러닝 버전을 하나 사야겠다. EL-X를 신었는데, 가끔 뾰족한 바위들이 있을 때 살짝 아팠다. 마지막 내리막길은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러너 분이 계셔서 최고 속도로 뛰어내려 갔는데, 그때 발바닥에 충격이 많이 누적된 것 같다. 대회 끝나고 이틀 정도 발바닥이 가끔 욱신 거렸다. 다행히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대회 시작 전,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많은 분들이 어떻게 그걸 뛰고 완주했냐고 놀라셨다. 그런데 이미 5년 넘게 신고 있고, 맨발 달리기를 자주 하면서 발바닥 근육들을 운동시켜주기에, 전혀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신발을 신으면 몸이 더 긴장해서, 달리기를 잘하지 못하는 편이다.


26km를 함께 해준 Vibram EL-X. 끄떡 없다. 9월에 사서, 잘 신고 있다.

대비
대회 나가기 전에 준섭 님, 관웅형과 대모산을 뛰었던 것 말고는 특별한 훈련을 하진 않았다. 평소에 마음 내키는 대로 근력 운동을 하고, 달리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에 운동할 때  트레드밀에서 경사를 좀 더 높여서 뛰는 연습을 추가 하긴 했다. 이게 그래도 도움이 된 것 같은 게, 대회에서 오르막 올라갈 때 트레드밀 위에서 연습했던 움직임이었기에 몸이 생각보다 더 힘들어하지 않았다. 아래는 10월 4일부터 11월 10일까지의 명상, 근력운동, 달리기 기록을 요약한 것 (전체 일지는 https://goo.gl/xBCHK7에서 볼 수 있다).


명상을 50%위로 올리고 싶다.

38일 동안 약 178km를 뛰었는데, 거의 매일 4.7km를 뛴 격이다 (실제 뛴 날들은 23일). 일지를 보면 확실히 꾸준함이 중요한 것 같다. 하루에 몰아서 15, 17 이상 뛴 날들이 몇 번 있었는데, 결국 평균을 내보면 매일 5km 뛴 것보다 많이 안 뛴 것. 한 때 일주일에 160km 정도 뛰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뛰었나 싶다.


생각

1. 고통과 웃음
트레일 러닝은 다양한 달리기를 하게 해 준다. 경사가 계속 바뀌고, 달리는 표면의 땅의 모습도 달라진다. 언덕을 오를 때 평지를 달리는 속도를 유지하려 하면 바로 얼굴에 인상이 찌 부려진다.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오버페이스를 하게 된다.


대회에서 1등한 줄리안이 뒤에 보인다. 줄리안이 속도를 높이면서 치고 나갔을 때, 오버페이스였더라도 줄리안과 같이 갔으면 어땠을까? Photo by: @purna_yu


남한산성 언덕을 오를 때 평지의 속도를 유지하려다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발견했다. 뛰기로 스스로 선택해놓고 힘들다고 고통받는 거가 갑자기 웃겼다.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웃었다(‘나 약간 미쳤나? 하는 생각도 3초 정도 들었다). 언덕이 주는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욕심 이상으로 뛰면 고통이 되고, 지금 내 몸에 맞게 뛰면 즐거움이 됐다. 내가 왜 달리는지, 다시 생각해 보았고, 결국 ‘재미’라고 몸이 말했다. 그래서 언덕에서는 웃음을 유지할 수 있는 속도로만 뛰었다.

2. 굿러너스컴퍼니 & 봉사자분들
정말 마킹이 완벽했다. 내가 고개 숙이고 알바 한거 빼고, ‘코스가 여기가 맞나?’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굿러너스컴퍼니 최고 �

그리고, 뛰는 도중 여기저기 봉사자분들이 사진을 찍어주시고, 응원을 해주셨다. CP에 계시던 분들은 내가 보이기도 전부터 “와~~!! 파이팅!!”하며 응원의 기운을 불여 넣어 주셨다. 돈을 하나도 안 받고 순전히 달리기에 대한 사랑으로 봉사를 나와주신 분들이었다. 봉사자분들 덕분에 즐겁게, 안전하게, 힘을 내면서 뛸 수 있었다. 2019년에는 꼭 한번 트레일 러닝 봉사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3. 사람들&감사(gratitude)
나는 달리기를 주로 혼자서 즐긴다. 올해가 되어서야 사람들과 나누고 같이 즐기기 시작했다. 남한산성 대회에 갔을 때 아무도 몰랐는데, 관웅형을 통해서 알게 된 준섭 님이 계셔서 마음이 편했다 (아, 그리고 서울플라이어스의 은진님을 몇 년 만에 뵌 것도 너무 반가웠다). 경기 시작 전에 준섭 님을 만났을 때 반갑게 인사하면서, 동지가 있는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가벼워졌다. 경기 후에는 준섭 님, 준섭 님을 후원하는 한국 호카오네 분들, 준섭 님 친구 예슬 님을 만나면서 사람들을 더 만나게 된 게 감사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맨발 달리기 잘 보고 있어요'라고 굿러너컴퍼니 이윤주 대표님이 응원해주셨을 때 달리기로 사람들과 연결되고 있는 게 느껴져서 다시 감사했다. 아직 직접 인사를 드리지는 못했지만 트레일 러닝 대회 때마다 사진을 찍어주시는 @purna_yu 님도 너무 감사하다. 결국, 달리기와 산, 사람들은 ‘감사’로 이어진다.

CP1 전에 눈앞에서 사라진 두 분, 그리고 산을 사랑하는 준섭님과 함께. 준섭님은 어제 대만 국제 대회에서 3위를 하셨다.


결과

1. 거리, 기록, 순위

운이 좋게도 3등을 했다. 3등으로 쭈욱 가다가, 알바를 하고 나와 보니 6등이 되어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계속 재밌게 뛰었고, 4등 분과 5초 차로 3등으로 들어갔다. 부상 없이 건강히 완주한 것에 감사하고, 등수는 운이 좋았다. 인스타로 팔로우하는 트레일 러닝 고수분들 대부분이 나오지 않기도 했다.


2. 재미


트레일 러닝의 재미를 다시 찾은 기분이다. 앞으로 더 자주 산을 달리고, 대회도 더 자주 나가고 싶다. 아쉽게도 이제 겨울이라 대회는 많이 없지만, 내년 봄에 날씨가 풀리면 종종 더 산을 달리고 싶다.


계속 즐겁게 뛰고 싶다. 그리고 트레드밀에서 뛸 때는 경사를 무조건 3 이상으로 놓아야겠다. 그러면 지루한 트레드밀 달리기가 확실히 더 재밌어진다 (보통 트레드밀 뛰면 무릎 아프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경사를 0으로 놓고 뛰면 무릎이 아프기 쉽다. 언덕을 뛸 때 자연스레 자세가 좋아진다. 트레드밀 뛸 때는 무조건 2 이상 놓기를 추천)


그리고 요새  1마일 4분 기록을 깬 Roger Bannister의 책을 읽고 있다.  읽으면서 1마일 기록 욕심이 난다. 잠실종합보조운동장에 좀 더 자주 가면서, 400m 반복 훈련을 해야겠다. 물론, 즐겁게!      



헤벌레 웃고 있지는 않지만, 마음속은 즐거움으로 가득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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