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고치던 청년이 죽었다.
들어오는 열차와 문에 끼어 몸이 부서져 죽었다.
작은 기쁨과 성실한 꿈도 죽었다.
누군가를 만나 수줍게 시작할 사랑도 죽었다.
그 꿈을 미안해하며 응원하던 엄마의 웃음도 죽었다.
끝내 열리지 않고 뜨거워지지 못한 컵라면처럼
세상도
죽었다.
다행이다. 내 차례가 아니어서, 내 가족이 아니어서
스물네 살
발전소 석탄과 기계를 보던 청년이 죽었다.
몸이 갈려 죽고도 네 시간을 그대로 방치되었다.
죽어라 노동하던 엄마는
노동하다 죽어간 아들을
죽었다고 말할 수 없어서 함께 죽었다.
죽은 엄마가 더는 죽지 말아야 할 아들들을 찾아다닌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무시로
죽었다.
다행이다. 내 차례가 아니어서, 내 가족이 아니어서
스물몇 살
대기업 빵공장에서 샌드위치 소스를 배합하던 청년이 죽었다.
어떤 간식을 좋아했을까? 첫 월급으로 뭘 샀고, 엄마에겐 뭘 해드렸을까
물어볼 수 없게 처참하게 소스배합기에 말려들어가 죽었다.
사람들은 빵과 샌드위치를 씹으며 죽음도 함께 씹어 삼켰다.
같은 기계에서
어떤
50대 엄마가
똑같이
죽었다.
다행이다. 내 차례가 아니어서, 내 가족이 아니어서
스물일곱 살
에어컨 설치일을 배워 일하던 청년이 죽었다.
쓰러지고도 뙤약볕에 한 시간을 누워있다가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가난해도 먹고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은
거짓말이 되었다. 참말들이 농약 먹은 참새 때처럼 죽었다.
덥다고 재난 문자는 요란하게 울리는데
차갑게 식은 청년의 입은
눈물도 한 방울도 없이 메말라
죽었다.
다행이다. 내 차례가 아니어서, 내 가족이 아니어서
스물세 살
건설현장이라도 좋다며 땀 흘려 일하던 청년이 죽었다.
고장 난 크레인 전원을 끄러 올라가서는 감전사했다.
안전을 위한 최첨단 CCTV를 자랑하던 회사는
그 죽음을 40분 동안 훔쳐봤다. 사람을 본 게 아니라.
죽음을 봤다.
그 자리에 올라가서 전원 버튼을 눌러보는 상상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도 같이 죽었다.
고압전류에 꽁꽁 묶여서 온몸의 세포를 태우며
40분 동안 죽었다.
다행이다. 내 차례가 아니어서, 내 가족이 아니어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던 50대 배달원 아빠도
야근이 위험하다고 해도 강요에 못 이겨 수십 미터 조선소 현장에 올라간 하청업체 아빠도
아이 학원비 벌어보려고 주말에 총알배송 업체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아빠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들은 남겨졌고
슬픔은 금방 말라버린다.
다행이다. 내 차례가 아니어서, 내 가족이 아니어서
학원비가 없어 빵공장으로, 건설현장으로 목숨 걸고 일하러 가면서
공부 열심히 해라! 너는 저런 곳에서 일하면 안 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서
저런 일 시키는 사람이 되라고
엄마, 아빠는
저런 일 하러 간다.
다행이다. 그날 엄마는 아빠는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이다.
언젠가는 당신 차례가 오고, 당신 가족이 눈물짓는 날도
공평하게 올지 모른다.
수리가 제대로 안된 스크린 도어에서
한 밤중의 정전 때문에 어딘가에서
하필 무척 힘든 날 꺼진 에어컨 때문에
어설프게 지어진 아파트에서
총알처럼 받아보던 새벽배달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든 알 수 없는 이유에서든
다행이다.
눈물조차 없는 당신에게도
결국은 공평하게 찾아올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