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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Sep 27. 2020

일본의 현대미술이 3월 11일을 기억하는 방법

잊거나 또는 기억하거나, 롯본기 모리미술관의 <STARS>展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체코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다. 프라하의 봄은 실패한 혁명이다. 소련의 탱크와 총칼에 무참히 진압되고 만다. 주인공 사비나는 체코 출신의 화가다. 사비나는 자신의 작품이 '공산주의에 억압받는 불쌍한 체코인'의 맥락으로 해석되지 않기를 원하며, 틀에서 벗어난 작품을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도 한다. 아쉽게도 그녀 생각처럼 잘 안 된다. '키치'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현대미술을 감상하다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사비나가 떠오른다. 사비나의 작품을 제멋대로 해석해 좋아하기로 한 사람들은 아마 사비나가 키치를 혐오하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이 작품은 억압받는 체코 민중의 슬픔을 잘 보여주는군"이라고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실은 선데이수도 그렇다. 일본 현대미술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일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미술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볼 수 있다고 믿는다. 진짜로 작가가 그런 의도를 갖고 만들었는지, 아니면 내 멋대로 일본 사람들이 생각할 법한 요소들을 대입해 키치적인 감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어쩌면 미술 감상은 이해를 닮은 오해의 의식인지도 모른다.


미술감상은 이해를 닮은 오해의 의식


일본의 현대미술 아티스트 6인의 작품을 모은 <STARS>라는 제목의 기획전에 다녀왔다. 모리미술관 전시는 여태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번 전시도 아주 좋았고, 여러 테마 중에서도 특히 동일본 대지진을 다룬 작품들을 인상적으로 보고 왔다.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어 브런치에 옮겨본다.





미야지마 타츠오, LED로 3천명의 염원을 담다


어떤 사건은 한 나라 국민들의 집단기억에 남아, 몇 년이 지나도 잊기 어려운 상처가 된다. 미국인에게는 2001년 9월 11일 일어난 911 테러가 그랬을 것이다. 일본인에게는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이 그렇다. 내년은 지진 발생 10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는 현재진행형이다.


여기 구도(求道)의 아티스트 미야지마 타츠오(Tatsuo Miyajima)가 있다. 그는 지난 3년간 3천명의 사람들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직격타를 입은 지역인 토호쿠 지방 주민이 대다수.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작업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오프라인 워크샵에서 어린이들과 교류하는 장면. 사진 출처는 SEA OF TOHOKU 웹페이지.


미야지마 타츠오는 LED를 오브제로 삼아 영원과 무한을 탐구하는 작품을 만들어 온 아티스트다. 그가 사용하는 LED 숫자판은 0부터 9까지의 숫자 중 어느 하나를 띄울 수 있다. 0이 3초, 그 다음은 8이 5초 라는 식으로 각각의 숫자가 점멸하는 시간을 설정할 수 있다. 여기에 색깔 정도? 그나마 LED 조명이 낼 수 있는 색깔이라는 게 어차피 제한적이다. 이번에 소개할 작품 <SEA OF TOHOKU>의 경우에는 초록과 파랑의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그렇게 그는 3천명의 사람들을 만나 각자가 전하고 싶은 '숫자'와 '시간'을 물었다. LED 화면에 0에서 9까지 중 어느 하나의 숫자가 깜빡일 수 있도록, 한 사람 한 사람이 숫자와 숫자가 화면에 떠 있는 시간을 정하게 해, 일종의 집단 메시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SEA OF TOHOKU. 자세히 보면 각각의 불빛이 LED 조명으로 비춘 숫자이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어둠 속에서 마치 반딧불처럼 숫자들이 깜빡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LED 조명이 깔린 배경에는 얕은 물이 깔려있다. 물 위에 푸른 조명을 띄워 바다를 표현하려 했다고 했다.


동일본 대지진의 가장 큰 피해지역인 토호쿠는 해안지형이 많은 곳이다. 바다는 지역 주민들에게 아름다운 풍경과 맛있는 해산물을 제공했지만, 대지진 이후에는 거대한 쓰나미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쓰나미로 인한 피해 이후에도 매일 생활공간의 일부에서 바다를 바라보아야 하는 토호쿠 지역 주민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사회경제적 지위와 무관하게 모두에게 평등한 충격을 가져다 준 자연재해 이후에, 이들은 자신들을 둘러 싼 세상의 어려움에 어떻게 공감해나가고 있을까?


백 마디 말보다 한 마디 눈빛이 더 따뜻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미야지마 타츠오가 만난 3천명의 사람들 각자 동일본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한 트럭도 더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 안에는 노인도, 중년의 남성과 여성도, 토호쿠에서 태어 나 지금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서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도, 그리고 앞으로 이 지역의 미래가 될 어린 아이들도 있다. 미야지마 타츠오는 이들의 백 마디 말을 LED 조명 하나로 환산해, 어둠속을 비추는 3천 개의 빛으로 만들어 두었다.


조명이 깜빡이는 모양이 마치, 사람의 시선 같았다.

눈을 깜빡이며 이 쪽을 바라보는, 연대와 연민의 시선 말이다.





무라카미 다카시, 금기에 도전하다.


미술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웃는 꽃"은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 같다. 사방으로 꽃잎을 만개하고 활짝 웃고 있는 바로 "그 꽃"이다. 루이비통 유니클로 반스 등 유명 패션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을 다수 진행해왔기 때문에 미술관 안에서보다 어쩌면 밖에서 더 잘 알려졌을지도 모르는 아이콘이다.


무라카미 다카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된 바로 "그 꽃". 사진은 카이카이 키키 웹 사이트에서.


솔직히 무라카미 다카시 작품에 별 기대가 없었다. 내 인식 속에서는 그냥 화려한, 팝아트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는 작가 정도로만 기억이 됐다. 그러던 중 이번 <STARS> 전시회에서 내 머리를 세게 때린 작품을 만났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원전(원자력발전소)을 보러 가요>.


시, 회화, 음악,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작품이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시를 쓰고, 이 시를 바탕으로 음악을 작곡한 다음, 스스로 영상연출에 참여해 뮤직비디오까지 만들었다. 시도 자체도 좋았지만, 내용이 더 충격적이었다. 일본 사회에서 어지간해서는 잘 건드리지 않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그로 인한 방사능 피해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어떻게 후쿠시마에 대한 대화를 피하는가. 일본 정부가 도쿄 올림픽의 테마를 '부흥'과 '재건'으로 정할 정도로 후쿠시마의 '부흥'과 '재건'에 대해서는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게 맞다. 그런데 '부흥'과 '재건'을 하려면 현재의 '피해'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야기가 그 쪽으로 흘러가면 묘하게 공기가 달라진다.


일본어에 '공기를 읽다(空気を読む)'라는 표현이 있다. 한국어로 바꾸면 눈치 좀 챙기라는 뜻이다. '피해' 말고 '부흥'과 '재건'에 대해 이야기해. 열린 담론이 닫힌 담론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무라카미 다카시, <원전을 보러 가요> (2020)
다음주 일요일에 여자친구와 원자력 발전소를 보러 가요. 야마노테선과 신칸선을 타고 후쿠시마로 가서, 렌트카를 빌려 2번 국도를 달릴거에요. 저번 달 원전 반대 시위에 갔었어요. 다들 아주 잘 알고 있던데요. 원자력 발전소뿐 아니라 식량오염, 수입과 관련된 문제들 말이에요.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뭔가 읽어보려고 해도 어차피 잘 이해를 못할거에요. 차라리 직접 보러 가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도착했습니다. "제한구역" 진입도 아주 수월했어요. 기분이 고양되더군요. 그리고 보았어요. 원자로 2호를요. 아주 비현실적으로 보였어요. 그 날 바람은 부드럽고 바닷공기는 시원했어요. 새는 지저귀고, 꽃은 피어있고. 아름다웠어요. SF소설 속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에 던져진 것만 같았죠. 콧물이 좀 나오고 재채기를 멈출 수 없었어요. 아마 꽃가루 알레르기겠죠.

다음 목적지는... 그 유명한 유령 상점가에요. TV에서 봤던 야생 멧돼지를 찾고 싶었는데 보이지 않더군요. 별 일 없었어요. 상점가에는 드문드문 문을 연 가게가 있었죠. 우리는 해산물덮밥을 주문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온 게 기쁘지 않으세요?" 우리는 환영받았다고 느꼈어요. "인간은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모습일까?" "아니, 어쩌면 방사능에도 버틸 수 있도록 유전적으로 적응할지도 모르지." "아냐, 우리는 다 죽고 말거야." 편의점 앞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했어요. 그 날 바람은 부드럽고 바닷공기는 시원했어요. 새는 지저귀고, 꽃은 피어있고. 아름다웠어요. SF소설 속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에 던져진 것만 같았죠.

그리고 우리는 생각했어요. 미래의 행복에 대해서. 무엇이 행복일까요? 집에 돌아와서, 친구에게 빌려 온 가이거 측정기를 신발에 대 보았어요. 엄청난 소리를 내더군요. 신발을 내다버렸어요. 그 날 바람은 부드럽고 바닷공기는 시원했어요. 새는 지저귀고, 꽃은 피어있고. 아름다웠어요. SF소설 속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에 던져진 것만 같았죠. 우리는 더 이상 원전 반대 시위에는 가지 않았어요. "다음엔 러시아의 거대한 분화구를 보러 가자. 아니면 군함도를." 그게 우리 계획이었어요.


<원전을 보러가요>의 뮤직비디오에는 귀여운 고양이 탈을 쓴 남녀가 등장한다. 이들은 도쿄 어딘가의 좁은 집에서 베이컨과 계란을 구워 아침식사를 한다. 지극히 발랄한 목소리로 "다음주 일요일에는 여자친구랑 원전을 보러 가려고요"라고 노래한다.


남녀는 정말로 후쿠시마로 원전을 보러 간다. "제한구역" 안까지 들어가 원전 사고의 진앙지인 2호기를 멀리서 구경하고, 황량한 상점가를 돌아본 다음, 해산물덮밥을 먹고 집에 돌아온다. 그 날 바람은 부드럽고 바닷공기는 시원했다고 말한다. 새는 지저귀고, 꽃은 피어있고, 아름다웠다고. 마치 SF소설 속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에 던져진 것만 같았다고 말이다. 뮤직비디오는 태평하다고까지 느껴지는 발랄한 음률로 이들의 여정을 노래한다. 8분 내내 스크린 앞에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다. 이게 뭐지? 대체 왜 이런 작품을 만든 거지?


무라카미 다카시의 페이스북에서 이 작품을 만든 의도를 설명하는 글을 읽었다. 그제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영어 원문을 한국어로 옮겨본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고, 뒤이어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도쿄 인근까지 고농도의 방사능 피해가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도쿄올림픽이 열린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아마 선수들도 복잡한 심정이었겠죠.

도쿄올림픽 직전의 일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내가 만약 그런 걱정을 입 밖에 내면, 나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내 뇌가 방사능에 절여지지 않았는지 의심했겠죠.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그로 인한 방사능 피해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오늘날 일본 사회의 초상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코로나19로 한동안은 도쿄올림픽 개최가 미뤄진 만큼,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해서 <원전을 보러가요> 프로젝트를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사비나는 화가로서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체코인"이라는 틀 속에 갇히는 것을 극렬히 거부했다. 현대미술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사비나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잘 알겠다. 중국인은 중국사회라는 맥락에서, 일본인은 일본사회라는 맥락에서, 한국인은 한국사회라는 맥락에서 해석된다. 아시아 국가들이 서구 중심의 아트 씬에서 주변부에 속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미국이나 유럽의 아티스트들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다.


'키치'의 엄중한 무게는 아티스트에게 숙제를 준다.


일본의 현대미술 아티스트들은 2011년 3월 11일을 기점으로 일본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동일본 대지진 이라는 대(大) 주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답을 내 놓아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것 같다. 롯본기 힐즈의 <STARS> 전시회에서 미야지마 타츠오와 무라카미 다카시 두 사람의 답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밝혀주는 연대와 공감의 힘,
일본 사회의 무관심을 까발리는 신랄함.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거대한 코끼리의 전체를 다 보기는 어렵지만, 멋진 작품 덕분에 그래도 다리 한 쪽 정도는 만져볼 수 있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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