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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na Nov 20. 2020

졸업

우울증 일기 5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졸업이 눈앞에 다가왔다. 졸업 논문을 쓰고 발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날들을 밤낮이 바뀐 채로 보내느라 체력은 말 그대로 바닥을 쳤다. 하루가 멀다 하고 속이 좋지 않아 소화제를 달고 살았다. 몇 번의 개인 면담과 수십 개의 이메일을 주고받고 나서야 졸업 논문을 제외하고 두 편 정도의 짧은 논문까지 작성할 수 있었다. 처음 졸업생을 배출하는 담당 교수에게도 어느 정도 부담감이 느껴졌을 시간들이었다. 마지막 논문 발표 전날에는 심한 몸살이 걸렸는데, 그 덕분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교수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나는 마감시간이 턱 끝까지 차올라야 일을 겨우 끝내고는 했다. 기쁜 마음으로 도와준 것은 아닐 테지만, 자주 얼굴도 보지 못하는 연구실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마지막 논문 디펜스까지 통과할 수 있었다. 모든 관문이 끝나고 얼마 뒤 교수는 나에게 물었다.


"이제 졸업하면 어떻게 할 거니?"


당연히 계획은 없었다.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들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 이렇게 대책 없는 사람이었니?"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역시나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듯했다. 하루 살기가 버거운데 무슨 수로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수한 학생에서 골칫덩이로 전락한듯했지만 그런 건 나에게 아무 상관없었다. 하루빨리 졸업을 하고 쉬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팔월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는 졸업식을 위해 학교를 찾아갔다. 사실 졸업식을 가야 할지 수없이 망설였다. 억지로 끼워 맞춰하는 졸업이었지만 사진 한 장 없는 건 억울하지 않겠냐는 J의 말에 못 이겨 그와 함께 졸업식에 참석했다. 가족들은 각자의 이유로 졸업식에는 함께하지 못했다. 아빠는 약일 년 전부터 베트남으로 일을 하러 떠났고, 엄마도 계속 직장 생활을 했다. 남동생도 나름대로의 학교생활로 바쁜 터였다. 나는 그냥 혼자 조용히 졸업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가족들을 오지 못하게 말렸다. 학부 졸업식에는 온 가족이 와서 함께 사진도 찍고 축하해 줬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담당 교수를 포함해 연구실 동료들까지 통틀어 내가 그날 졸업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개인적으로 얼마 전 교수에게 그동안 감사했다는 의미의 선물을 전달하고 난 후였지만 나는 그 흔한 졸업 축하 문자 하나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졸업식이 진행된 건물은 내가 속한 공대 건물 바로 옆이었지만 말이다. 아마 나만큼 모두가 나의 졸업을 기다려 온 것은 아닐까 싶다. J가 사다 준 꽃다발을 들고 흘러내리는 석사모를 억지로 고정한 채로 카메라 앞에서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다는 해방감과 함께 앞으로 다가올 흐릿한 미래와 뭔지 모를 외로움이 뒤엉킨 채로 그렇게 졸업식을 마쳤다. 


    살면서 수차례의 졸업식을 거쳐 왔지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졸업식은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는 것만 생각나고, 중학교 졸업식날에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졸업식 사진을 예쁘게 남기고 싶은 욕심에 나는 엄마에게 졸라 꽁꽁 묶고 다녔던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풀고, 드라이기로 열심히 굽실하게 손질을 했다. 졸업식 당일 아침, 정문 앞에 선도부와 함께 서있던 담임 선생님에게 발각된 덕분에 그 앞에서 한참 서서 벌을 받았고, 후에는 교무실로 불려 가 혼이 났다. 화장실에서 때 묻은 거울을 보며 억지로 물을 묻혀 머리를 펴느라 기껏 엄마가 손질해 준 머리가 엉망이 되어있는 꼴을 보자니 왈칵 눈물이 났다. 그때도 마지못해 담임 선생님 옆에서 애써 웃음 지으며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스친다. 지금 그 사진은 수납장 저 밑 어딘가에 있는 졸업 앨범 사이에 꽂혀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식날은 나는 울지 않았지만 하늘에서 지저분하게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나는 전날 울었다. 별거 아닌 얘기로 아빠와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던 것뿐이지만 나는 습관처럼 눈물을 흘렸다. 내가 눈물을 보이면 아빠는 항상 당황스러워 하시곤 했다. 원래 눈물을 흘리는 쪽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는 상대방의 입장 같은 건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학교 졸업식은 가족들과 점심 식사를 했던 식당이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점만 빼면 봐줄 만은 했다.

    한때는 이런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피치 못할 징크스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우울증을 치료하기로 마음먹은 이후에는 과거의 있던, 시간 속에 잊혔던 일들조차도 다르게 느껴지고는 한다. 그저 내가 자신감이 없었고, 소심하고 움츠려 든 마음에 너무 작은 일들에도 속상해한 것은 아닐지. 어렸을 때부터 쭉 우울증 비슷한 증상들을 겪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는 말이다. 과연 인생에서 '졸업'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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