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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na Nov 27. 2020

잃어버린 길

우울증 일기 6

    금의환향(錦衣還鄕)의 반대 의미로 금의야행(衣錦夜行)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에 걸맞은 형상으로 석사 학위를 위해 잠시 머물렀던 자취방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무리해서 시작한 공부였다. 공부가 그나마 가지고 있는 성향과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여차하면 박사과정까지 마칠 요량으로 벌인 일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모든 소화기(消化器)들은 어딘가 고장이 난 것 같았고, 피곤에 찌들어 몸은 항상 부어 있었으며, 반질했던 피부는 거칠어지고 엉망이 되었다. 만성 우울증 진단으로 상처 난 마음까지, 한 마디로 성한 곳이 없었다. 학부생 시절 받았던 이천만 원이 넘는 장학금이 무용지물로 느껴질 만큼 그동안 제대로 된 벌이를 하지 못한 대가로 학자금은 차곡히 쌓여있었고, 처음 교수가 제시했던 연구비는 연구실 인원이 늘어나면서 삼분의 일 정도로 줄어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받은 생활비 대출까지 그 위에 덤으로 얹혀있었다. 

    나는 학부 졸업을 마치고 나서부터 한동안 엄청난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 학기라도 등록금을 아껴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한 학기 빠르게 졸업해, 일 년간의 재수 생활로 친구들보다 늦춰질 졸업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이 지쳐버린 나 자신의 상태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에너지가 모두 방전돼서 도저히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말이다. 사백만 원이 넘는 등록금 따위는 미래의 나에게 던져두고 여덟 학기를 꽉 채워 천천히 졸업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게다가 나는 무의식 중에 친구들 보다 한 발자국 뒤처진 결과를 스스로에게 메꾸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곧 대기업에 입사할 예정인 친구, 캐나다 유학을 앞두고 있는 친구, 이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직업적인 장래가 보장된 친구들을 따라 나도 무엇인가 입으로 떠들어댈 수 있는 성과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나의 목을 조르는 게 가혹한 현실이 아니라 그저 나의 욕심이었음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집에 돌아와 가족들의 얼굴을 보는 게 무척이나 무안하고 미안했다. 참담한 결과를 등에 업고 다니느라 고개를 들 새가 없는 사람에게 마음대로 실망스러운 반응도 내비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할머니의 얼굴을 보면 전에 내 앞에서 소녀처럼 하시던 말씀이 한동안 귀에서 맴돌았다.


    "나도 박사 손녀 생기는 겨?"


굳이 진실을 따지고 들면 나는 박사를 하겠다고 약속드린 적은 없었다. 아마 할머니께서는 내가 열심히 학부 생활을 한 만큼 대학원 생활도 훌륭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음을 넘치게 주신 것 같다. 지금도 하나 이루어낸 게 없는 손녀에게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한다.


    "우리 손녀딸은 뭐든지 잘해. 나는 다 잘 해낼 거라고 믿어."


나는 이 년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 건강, 외모, 친구, 주변 사람들의 신뢰, 심지어 계획했던 미래까지, 나는 길을 잃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낯선 길에 서서 뚜렷이 보였던 건, 내가 뒤를 돌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있는 가족이었다. 그렇게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위하지 못한 채로 앞만 보며 달리려 했던 그 길이 과연 의미가 있었을까. 그 길은 내 마음속 욕심이 꾸며낸 가상(假像)에 불과한 길은 아니었을까. 


    대학원 졸업 이후 나는 '대인기피증'  혹은 ‘사회 공포증’과 유사한 증상을 호소했다. 나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할 때도 얼굴이 붉어지고 식은땀이 났고,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하는 것도 어려웠다. 집에서 편안히 식사를 하며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때때로 그랬다. 남들에게 나의 얼굴을 내미는 일이 고역처럼 느껴졌고, 그럴수록 나의 화장은 점차 두꺼워졌다. 집에서도 나는 민낯의 내 모습이 보기 싫어 거울을 멀리했고,  가끔 거울 속에 비치는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드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나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힘들어도 우울증에 걸릴 새도 없었어. 누울 자리가 있어야 다리를 뻗지."


한마디로 우울증은 속 편한 병이라는 식의 표현이었다. 비단 나에게만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 외에도 '너는 대체 뭐가 그렇게 모든 일이 힘들어?' 혹은 '그게 울 일이야?' 같은 말을 듣고 살았다. 나는 늘 남들과 다른,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부족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채찍질하는 방법밖에는 몰랐다.

    가족들에게 기대어 넋을 놓고 두문불출하며 지내던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발신처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고용복지센터’였다. 어떤 조건에서 내가 고용 상담의 대상자가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는 내 앞에 벽이 가로막고 서있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숨만 겨우 고르고 다시 남들과 같이 뛰기 위한 트랙에 설 준비를 시작했다.

    고용복지센터에서 서너 번의 상담을 받고 정부 지원금으로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무료'라는 점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학원 수강생이 된 나에게 자책감을 덜어주는 대목이었다.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증상을 겪는 것은 아니다. 나는 무기력함이 유독 심했고, 때때로 심한 감정 기복이 드러났다. 물론 우울증이 심할 때는 침대와 물아일체가 되어 씻는 것조차 버거운 숙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스스로 작은 목표를 심어주는 것이 효과가 있었다. 나는 쉬고 싶어 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다시 바쁜 현실로 돌아가는 것을 택한 것이다. 

    결과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나는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 마음으로 프로그래밍 수업을 수강했다. 취업을 목표로 한 수업은 커다란 골격은 학교 수업과 같았지만 세세한 내용은 확실히 차이는 있었다. 이론적인 부분보다는 실무 기술을 많이 익힐 수 있었다. 취업을 위해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에 위치한 학원에 아홉 시 반까지 도착해 저녁 먹을 시간이 될 때까지 공부하는 일정을 6개월간 지속했다. 그렇게 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으로 적당한 스트레스가 주는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그 사이, 대학원 시절 담당 교수와 친했던 동기들에게 종종 연락이 왔다.


"요새 뭐하고 지내?"


별거 아닌 짧은 말이 내가 대답하기 가장 힘든 질문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그냥 뭐, 쉬고 있어"라는 말로 대충 때웠다.


"한번 얼굴 봐야지."


이 말은 내가 항상 거짓으로 대답해야 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거절의 말 대신 "그래, 그래야지"라는 대답을 하곤 했다. 나는 그렇게 내가 피할 수 있는 일은 계속 피해 다녔다. 상처 받은 마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하지만 면접은 피할 수 없는 관문이었다. 어떤 면접이든 꼭 받는 고정적인 질문들이 있었다.  


"졸업 눈문은 어떤 내용이죠?"
"석사 학위를 받고 굳이 프로그램 개발을 하려고 하는 이유가 있나요?"
"아무래도 직업 특성상 밤샘 작업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 부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나에게 석사 학위는 오히려 매 면접마다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요소일 뿐이었다. 졸업 논문 내용이야 지금도 술술 나올 정도이지만 나머지 질문에는 늘 거짓의 반복이었다.  


 "막상 연구 분야로 공부하다 보니 그보다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이 더 흥미롭고 계속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부생 시절에도 프로젝트를 위해 밤을 새운 경험이 자주 있었습니다. 개발자에게 밤샘 작업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속마음은 이러했다.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이 끔찍했고, 그나마 전공을 살려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저는 체력이 줄곧 바닥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신력으로 이겨내 봐야죠.'


아마 면접관 앞에서 본인의 진심을 다 내비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도 반복되다 보니 익숙해졌고, 나는 어느새 '개발자가 적성에 맞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들도 다 하는 사회생활은 나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졌다. 그렇게 작년에 내가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한 회사에 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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