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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na Dec 04. 2020

이별과 현실

우울증 일기 7

    나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가까운 두 사람과 이별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친하게 지내왔던 친구가 내가 학부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을 무렵에 싱가포르로 떠났다. 줄곧 해외 취업 준비를 해왔던 걸 알고 있었던 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쳐오니 밀려오는 헛헛함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나보다 똑똑하고 어른스러운,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이해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친구가 떠나고 몇 달 뒤, 이번엔 아빠가 베트남으로 떠났다. 직전까지 다니던 회사에서 주어진 과중한 업무 때문에 퇴사를 하고 다른 일을 찾게 된 것이었다. 그때 아빠는 이미 쉰 살이 넘었지만 제대로 된 벌이를 하고 있는 자식은 없었고, 큰 딸은 눈치 없이 이미 대학원에 진학한 후였다.  


"아빠, 다음 주에 베트남으로 가게 될 것 같아."


나에게 먼저 말을 던진 엄마의 표정에서는 안도와 불안,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때만 해도 사실 나는 안도하는 마음이 더 컸다. 대학원 생활을 앞두고 한 달 넘게 아빠가 별다른 수입 없이 집에 있는 모습을 보는 일도 자식으로서 편치는 않았다. 

    늘 그렇듯 기다리지 않는 날을 향한 시간은 걸음이 빨랐다. 그날 아빠를 배웅했던 장면은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있다. 나는 소매단이 넓고 큼직한 긴팔 티셔츠에 잠옷 바지 차림으로 아빠를 배웅했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여행 캐리어로는 부족한지, 아빠는 어깨에 매는 가방까지 짊어지고 서있었다. 남아 있는 가족들 중 아빠가 떠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에도, 정작 아빠는 가족들을 위해서 선택한 길이라는 사실이 뭔지 모르게 억울하면서도 슬펐다. 아빠가 공항버스를 타는 곳까지 차로 데려다 주기로 한 엄마는 나보다 담담해 보였다. 아빠가 겉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짐을 옮기는 모습을 할머니와 나란히 서서 지켜봤다. 나는 전날부터 스스로 절대 그 앞에서 울지 않기로 약속한 터라, 자꾸 비집고 올라오는 슬프다는 생각을 억지로 구겨 넣으며 아빠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빠, 잘 가!"


나는 아들보다도 애교가 없는 딸이다. 항상 아빠와 나는 여느 아들과 아버지 사이 대화 못지않게 밋밋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애써 최대한 밝고 가벼운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 나를 잘 아는 아빠는 장난기 있는 말투로 되받아쳤다.


"그래, 제발 아프지 좀 말고. 엄마 잘 돌봐줘라."


그 말을 들은 엄마의 "아이고. 누가 누굴 돌봐준다고 그래."라는 말 덕분에 서로 웃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이별을 했다.

    나는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곧장 안방에 딸린 화장실로 갔다. 억지로 끝까지 참았던 눈물을 몰래 닦아내고 아무렇지 않게 거실로 나왔을 땐 유난히 휑해 보이는 거실 한편에 평소보다 작아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와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앉아 그저 멍하니 엄마의 발걸음 소리를 기다렸다.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는 눈물범벅이지 않을까 했던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단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베트남까지 잘 도착하겠지?"


슬픔도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듯했다. 장시간의 이별이라는 것을 뒤로하고 우리는 어느새 이런 대화를 나눴다.


"베트남까지 얼마나 걸리지?"
"거기도 와이파이 잘 되려나?"
"아빠가 숙소 도착하면 전화 준댔어."


어떤 형태의 이별이든, 그것에 한시라도 빨리 익숙해지는 게 유일한 해답일지도 모른다.

     아빠와 친구를 떠나보내고 나는 다음 해에 졸업을 했고 그다음 해에야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매일 바쁘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점차 내가 정신과를 방문했었다는, 만성 우울증 진단을 받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잊어갔다. 우울증은 때때로 환절기 감기처럼 나타났지만 난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겨 말 그대로 '만성(慢性)'이 되어갔다. 

   6개월만 바짝 일하고 돌아오겠다던 아빠는 5년 가까이 가족과 떨어져 베트남에 있는 한국 회사에서 줄곧 일을 했다. 그래도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일주일 씩 주어지는 휴가가 있었기에 우리 가족은 잘 버텨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 발생한 전 세계적인 바이러스 유행에 최근 일 년이 넘도록 아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운행하는 비행기 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들어오게 되면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기 힘들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 나는 그 사이 퇴사를 해 남는 게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서로 만나기 위해선 너무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나는 퇴사를 하고 나서 남아있는 퇴직금으로 엄마와 작은 사업을 꾸려나가며 지냈다. 의류 사업은 엄마의 숙원 같은 것이었다. 어렸을 적 엄마가 입혀준 옷을 입은 사진을 보면 엄마가 얼마나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엄마는 학창 시절부터 미술과 음악을 비롯해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고등학교 때는 디자이너 밑에서 일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준다는 유명 제봉 학원에 다니길 원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꿈을 포기했다. 나도 그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20대 시절에는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라리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옷도 '일'이 되다 보니 때론 지겹기도 하고 이젠 손에 잡히는 대로 입기도 한다. 번 돈보다 쓴 돈이 더 많은 듯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돈이 아깝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엄마와 나는 종종 잠들기 전 내 방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내 방'이라고 하기에는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잠을 자기도 했던 방이기도 하고, 아빠가 베트남으로 가기 전까지는 주로 아빠가 잠을 잤던 방이었다. 엄마는 나와 마주 보기 위해 주로 책상 맞은편에 붙어있는 침대 끝에 걸쳐 앉아 얘기를 했고, 나는 책상 의자에 앉은 채로 모니터를 바라보거나 책상 한끝을 바라보며 마음은 온전히 엄마에게 집중해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내가 나이가 들면서 엄마는 나에게도 터놓고 말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아빠와 문자로 감정이 상했던 이야기부터 과거에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는, 주로 남편에게 꺼내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딸로서는 무척이나 기쁜 일이다. 타지에 있는 아빠를 대신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그렇지만 나는 밤마다 정신과 약을 찾아 먹는 환자였기에 엄마는 항상 내 상태를 의식해 마음속 끝에 있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고, 어떻게 하면 내가 힘들어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딸로서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어느 일요일 저녁 아홉 시쯤이었다. 내일 출근하기 위해 곧 잠을 청해야 하는 엄마는 내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베트남에 있는 아빠와 그의 친구와의 사업에 대한 것이었다. 엄마에게 전해 듣는 바로는 그 둘은 서로에게 썩 궁합이 잘 맞는 파트너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약 두 달 전 베트남에 있는 회사에서 퇴직한 오십 대 가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했다. 엄마는 그런 상황 속에서 가족의 경제 상황을 걱정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힘들면 들어와야 하는 게 맞지 않아? 힘들다는 말을 하지 말던가."


엄마는 걱정스러운 본인 마음을 미처 헤아려주지 못하는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큰 것 같았다. (엄마는 참을성과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최근에는 갱년기 증상을 겪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그 뒤에 나에게 할 말들을 알고 있었지만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다. 내가 짐작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결론에 다다랐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엄마가 짊어진 짐이 너무 커."


삼십 년을 키워준 엄마에게 나는 자식 도리를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 베트남 상황만 괜찮았어도 엄마는 나에게 다시 직장을 다니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엄마와 내가 약 일 년간 일궈온 의류 사업을 접어 둘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경제적인 부담과 체력 소모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현실적으로는 내가 내일 당장이라도 면접을 보고 그다음 날 출근하는 것이 마땅해 보였다. 엄마는 우선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보자는 말로 얘기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지켜보자'라는 말을 몇 달간 지속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늘 잠이 안 온다는 이유로 내 방에 찾아왔는데, 얼마 못가 하품으로 충혈된 눈으로 방을 나가곤 했다. 방에 혼자 남겨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엄마도 같은 시각 밤새 뒤척였을지 모른다. 나 자신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나를 위하는 일이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는 비겁한 마음 뒤에 접어 둔 현실이 목을 조르는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있었고 회사 이야기나 어떤 새로운 책임을 지는 일들, 심지어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는 일조차 생각하면 심장이 뛰고 숨을 쉬기 힘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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