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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na Dec 18. 2020

과거로부터

우울증 일기 9

나의 스무 살 생일은 공교롭게도 음력 생일과 양력 생일이 겹치는 날이었는데, 하루 종일 우중충하게 비가 내렸다. 나는 그런 장면들이 나와 썩 어울린다고 생각하곤 했다. 나에게 '행복'과 '안정'같은 감정은 그저 '폭풍전야'쯤으로 생각되는 것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초등학교 1학년이 끝나기 한 달 전쯤에 전학을 왔다. 엄마는 몇 년 뒤에는 다시 돌아갈 집을 서울에 남겨두고, 아토피가 있는 아들과 허약 체질인 딸이 지내기에 적당한 곳으로 이사를 왔다. 지금과는 많이 다르게 아직 아파트도 몇 군데 지어지지 않은, 도시와 시골의 중간 어디쯤에 속하는 곳이었다. 

    일명 '주의력 결핍장애' 증상이 있던 동생을 위해 엄마는 당신의 낯을 가리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현관문을 항상 열어놓다시피 하며, 동생 나이 또래의 아이가 있는 집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 덕분에 동생도 나도 새로운 동네에 곧잘 적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매일 엄마가 직접 차려주는 밥을 먹었고, 엄마는 간식으로 식빵이나 피자를 만들어 주거나 쿠키를 구워주기도 했다. (아직도 내가 살면서 먹어 본 쿠키 중 단연 최고는 엄마가 당시에 만들어준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릿 쿠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꽤 안정적이었다. 

    내가 열두 살 때쯤 어느 평화로운 주말 아침이었다. 그때 내 방 베란다 창에는 잔잔한 무늬가 수놓아진 흰색 커튼이 달려 있었다. 커튼 맨 위 레이스 장식 밑에는 초등학생 여자아이에게 어울리는 귀여운 손뜨개 토끼 인형 두 개가 장식 삼아 매달려 있었고, 커튼 옆으로는 흰색 바탕의 솜이불을 덮고 있는 침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반대편에는 정사각형의 원목 식탁 겸 공부할 수 있는 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미국에 살고 계신 이모할머니가 보내준 백가지가 넘는 색상의 크레용이 담긴 노란색 플라스틱 박스가 있었다.

    평소보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눈을 떴을 땐, 흰색 커튼이 더 이상 새하얗게 보일 수 없을 만큼 환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커튼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나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가 덮고 있는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당시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내가 일어나는 소리에 고개를 든 엄마는 먼저 말을 건넸다.


"우리 딸, 엄마 사랑하지?"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과 내가 엄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날 이후로 네 식구가 살던 32평 아파트에 쫓겨나다시피 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집으로 들어갔다. 우리에겐 5평 정도 될까 말까 한 방 한 칸이 주어졌다. 약 20년 가까이 지난 후에야 아빠가 당시에 잘못된 투자로 3억 원에 달하는 빚을 지게 되어 집을 채권자에게 넘기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자세한 사실을 알기 전에도 우리가 그저 길가에 나앉은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사춘기 여학생도 아니었고 동생은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잠을 잘 때면 무서움을 많이 탔던 나는 한 방에서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과 함께 잠을 자는 것이 싫지 만은 않았다. 내 방이 없어진 것도 그다지 속이 상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나는 내가 속이 상하거나 슬픈 기색을 보이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유일하게 속이 상했던 건, 동생과 내가 잠자리에 들면 추운 겨울에도 베란다에 혼자 나가 차디찬 바닥 위에 촛불 하나를 켜고 성서 책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를 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일이었다. 가끔 엄마가 흐느끼며 신에게 애원하는 고독한 외침도 들렸다. 처음으로 아빠나 엄마도 힘든 인생을 사는 힘없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갖고 싶은 걸 사달라고 마냥 조르거나 평생 기대기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특히 내가 엄마에게 깊은 연민의 감정을 느꼈던 이유는, 그때까지만 해도 상당히 예민한 성격과 다소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 아빠로부터 받은 상처가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년시절을 떠올리면 대부분 나는 서러워 울고 있거나, 엄마에게 혼이 나 집 밖으로 내쫓기거나, 아빠가 화를 내는 장면들이 가득한데, 애석하게도 아빠가 맛있는 음식을 사주거나 두 발 자전거 타는 법을 내게 알려 주기 위해서 한 달을 주말마다 애썼던 기억보다는 (나는 타고난 운동 신경이 전혀 없다.), 유아용으로 만들어진 낮은 책상을 화가 나 엎어버리는 모습, 밤늦게 엄마와 큰 소리로 싸우며 시시때때로 리모컨을 집어던지는 소리에 내내 기도를 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던 기억들이 더 생생했다. 

    내가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동생과 싸우지 않고, 숙제를 알아서 하고,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잠에 드시는 늦은 저녁때쯤, 부엌일이 모두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붙박이로 설치되어 있는 간이 식탁에 앉아 공부를 했다. 공부하는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성적이 떨어진다면 엄마가 여간 속상해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는 집 밖에서 사사로운 일로 속이 상하거나 기분이 나쁜 일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내가 무슨 일을 겪든 간에 지금 엄마가 느끼고 있는 고통과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십 년 뒤, 아니 지금의 나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그렇다고 한 번도 동생과 싸우지 않고 엄마 속을 썩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백 점을 받은 받아쓰기 시험지나, 학교 선생님이 칭찬해 준 말 혹은 상장을 엄마에게 전달하는 것에 만족을 느꼈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가 통한 것일까. 우리는 바닥이었던 재정 상황을 꽤 빠르게 회복했다. 외할머니 집으로 들어간 지 삼 년이 채 되지 않아 차로 이십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나는 내 방이 다시 생겼다. 다니던 학교와는 멀어지고 버스도 그다지 많이 지나가지 않는 외진 곳이라 불편했지만, 나는 얹혀사는 기분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학교 성적도 그맘때쯤 최고를 기록했다. 

모든 것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고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갈 때쯤이었다. 한창 여름이 지나가고 있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우리가 방 한 칸을 얻어 지내는 동안에도 이미 당뇨를 앓고 계셨다. 결국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나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보다는 '엄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더 힘들었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기도했다. 난 엄마와 아빠가 장례식장을 지키는 동안 아직 초등학생인 동생과 작고 겁이 많지만 목청이 큰 강아지와 함께 집을 지켰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방 한 칸을 얻어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지금껏 한 번도 밖에서 남에게 돈을 받아본 적이 없고, 혼자 살아본 적은 더더욱 없는 외할머니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내 방은 다시 없어졌다. 나는 그리 넓지 않은 집에서 거처를 꽤 많이 옮기면서 지냈다. 엄마도 늘 방이 없었다. 엄마와 나는 때로는 안방에서 할머니와, 때론 거실에서 지내다가, 아빠가 베트남으로 떠나고 나서야 아빠가 썼던 방을 내가 잠시 빌려 쓰고 있다.

    살면서 완벽에 가까워지려는 순간마다 위기가 찾아왔던 것 같다. 그래서 늘 행복한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그다음에 다가올 실망감을 기다리며, 잠시라도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다. 굴러가는 낙엽을 보면서도 깔깔댄다는 나이에도 나는 항상 평점심을 지키려 애써 노력하며 작은 것에 웃거나 즐거워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슬프고 힘든 일이 닥치면 그게 마치 '내 인생에 맞는'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인생을 그간의 '과오'를 뉘우치고, 살면서 풀어 나가야 하는 '숙제'를 해결해야 하는 '고행의 길'쯤으로 여겼다. 나는 겉으로는 점차 성숙해지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열두 살의 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우울함에 젖어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정말 좋아하는 것이 어떤 건지, 무엇 때문에 속상한 건지 생각하는 방법을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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