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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na Dec 25. 2020

Mr.Blue

우울증 일기 10

동생의 아토피 치료를 위해 방문했던 한 한의원에서는 부모의 생년월일과 체질에 대한 정보를 약 조제 시 필요로 했다. 직접 생일 날짜를 종이에 받아 적던 의사는 흠칫 놀란 얼굴로 다시금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뒤돌아서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둘은 만날 수가 없는데......"


그는 사주팔자를 간단하게나마 볼 줄 알았던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가 정확히 어떤 기준에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말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아빠를 쏙 빼닮았다. 생김새부터 내면까지 똑 닮아서, 가끔은 아침밥을 먹는 나 자신을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아빠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표정도 닮았고 좋아하는 음식도 같다. 엄마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부분이 많은데, 이것을 달리 말하면 아빠와 엄마는 서로 맞는 구석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올해는 결혼 삼십 주년이었는데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모습을 지켜본 목격자로서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한때는 나도 사주팔자는 아니더라도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이 있다고 믿는 편이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과거의 잘못은 후에 어떤 방식으로든 단죄되어야 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런 관념은 자칫 깊은 좌절에 빠질 때면 그 원인을 나 자신의 잘못으로 치부하거나, 내 앞으로 펼쳐진 인생의 길이 잘 포장된 고속도로가 아닌 자갈 밭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이런 생각들이 켜켜이 쌓여 우울증으로 가는 계단을 만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에서 가장 커다란 숙제는 내가 '아빠와 많이 닮았다는 것'이었다. 아빠의 예민함은 지금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예전엔 가족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때가 자주 있었다. 아빠는 수십 차례 직장을 옮겨 다녔는데, 어느 대기업 심리 검사 결과에서는 '사회생활 불가능'이라는 판정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 검사에 따르면 아빠에게 권장되는 직업은 '종교인' 혹은 '음악인'이라고 했고, 평범한 사회생활을 하는 일은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엄마와 나는 가족끼리 주말에 외식을 하거나, 가족 모임에 참석할 때, 친척 집에 가야 하는 명절 아침 등 네 가족이 함께 자가용을 타고 이동해야 하는 날이면 바짝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나는 그날 우는 일이 '당첨'되는 사람이 아니기를 혹은 행운의 여신이 우리를 도와 아무 탈 없이 무사히 해가 저물기를 바라곤 했다. 

    하루는 차로 삼십 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계곡에 가서 점심으로 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쯤이라, 엄마는 나와 동생의 외출 준비를 도우면서 동시에 필요한 도구들과 재료들을 혼자 오롯이 챙겨야 했다. 성미가 급한 아빠는 그 사이 이미 혼자 차에 시동을 걸기 위해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천천히 나와."


아빠는 우리가 외출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지만, 남아 있는 우리는 늘 이렇게 받아들였다. '아, 지금부터 최대한 빨리 나가야겠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마치 항공기가 이륙하기 15분 전이지만 아직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이 느낄법한 조급함에 휩싸였다. 그럴 때면 우리는 '너라도 빨리 나가'라며 서로를 부추기고, 이미 짜증이 만연한 채로 서둘러 집을 나서곤 했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엄마 덕분에 우리는 아무 탈 없이 제 시각에 출발했다. 계곡으로 가는 도로는 주말 치고는 한산했고, 도착하고 나서도 고기를 구워 먹기 꽤 괜찮은 자리도 금세 찾았다. 아빠는 능숙하게 번개탄에 불을 붙이고 그 위에 석쇠를 올렸다. 아빠는 고기를 굉장히 잘 굽는 편이므로, 이쯤 되면 맛있게 점심을 먹고 즐기면 되겠다 싶은 순간이었다.


"고추장은?" 

아빠의 물음에 엄마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마지막에 깜빡했네." 

순간 아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엄마에게 쏘아붙였다.

"그것도 안 챙기고 뭐 했어?"


주말 아침부터 거의 모든 걸 혼자 준비했던 엄마를 지켜본 나는 마치 내가 그 말을 들은 양 가슴이 아팠다. 입안에 있는 고기는 맛을 잃었고, 눈치 없이 연기는 엄마를 향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이보다 더한 장면들을 수백 번 더 목격했다고 확언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도. 또한 나와 동생도 반복적으로 겪는 일이었다는 것도 말이다.

    이런 긴장의 연속들이 일상에 너무나 만연해 있어서인지, 엄마는 내가 짜증을 내거나 예민한 태도를 보일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너까지 왜 이래?"
"지 아빠랑 똑같아."


나는 누구보다도 아빠와 닮고 싶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아빠와 닮은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것은 나의 평생의 '죄목'과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내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로지 '성격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내 성격이나 성향을 드러내는 것들은 모두 나의 죄목의 '증거'이므로 어떻게 그것들을 고쳐 써먹을지 만을 궁리하며 살았다. 사춘기 이후로 나는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예민함, 억울함, 슬픔의 감정을 자주 느꼈는데, 나는 그 원인을 '유전자의 힘'으로 결론을 내리곤 했다. 어떻게든 거스를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한참 다니고 있을 때쯤 아빠는 사업을 또 한 번 크게 실패했다. 겨우겨우 신용을 회복하고 있었던 터라 우리 가족에게는 실로 치명적이었다. 나는 인생의 내리막길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것일지 가늠할 수 없었고, 늘 마음 한편으로 응원해왔던 아빠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지 의심스러웠다. 사업에 눈이 멀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아빠는 지구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도는 달과 같이 느껴졌다. 아빠를 이해하는 일은 달의 뒷면을 보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날 내가 학교에서 늦은 귀가를 했을 때, 아빠는 퇴근 후 이미 저녁을 먹고 방 한구석에 누워 낮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평소 잘 보지도 않는 드라마가 한창 송출되고 있었고, 나는 단순히 드라마가 무슨 내용일지 궁금해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극 중 주인공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가 오열을 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그때, 아빠의 입에서 무심히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부럽네."


 나는 열연하는 배우의 연기에 심취해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아빠의 말의 의미를 해석하기 어려웠다. 나는 눈치 없이 물었다.


"무슨 말이야?"

아빠는 씁쓸하고 서글픈 눈빛과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저렇게 찾아가 울 곳이 없어서."


    친할아버지는 아빠가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화장한 유골은 어디 강가에 뿌려졌다고 했다. 아빠는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게다가 유년시절에는 식당 일을 하시는 어머니를 대신해 친할머니 손에 자랐고, 의지할 형제도 없었다. 불행하게도 아빠는 '가족'이라는 사회를 남들과는 다른 형태로 경험했다. 

    이후 자라서도 아빠는 어머니의 관심 밖이었던 듯하다. 친할머니는 아빠가 엄마와 결혼할 무렵에 재혼을 하셨다. 재혼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친할머니는 아빠가 느꼈을 외로움, 섭섭함 등의 감정을 들춰보려 하지도 않았다. 결혼 이후 대부분의 갈등은 우리가 한 번도 자의적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던, 아빠에게는 더욱 '아버지'였던 적이 없었던, 그저 영원히 '남'일 뿐이었던 '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곤 했는데, 항상 친할머니는 당신의 아들보다 낯선 '그 사람'의 편이었고, 결국 지금은 아들과 영원히 '남'이 되는 것을 선택하셨다. 아빠는 평생 철저히 '혼자'인 삶을 살아왔다. 어쩌면 아빠에게 '가족'의 의미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달의 뒷면 같은 것이었다.

     마음의 상처는 몸에 난 상처와 다르지 않다. 단지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고통을 참아내고 인내하는 방법만을 강구한다. 또 그것을 감추기 위한 일환으로 제각기 다른 방식의 방어기제를 선택한다. 누군가는 몰래 우는 것을 선택하고, 또 누군가는 남 탓을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불현듯 분노를 표출한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쯤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다. 나는 많은 시간들을 아빠를 원망하며 흘려보냈지만 사실 그 시간 동안 아빠는 가족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었을지 모르고, 괜히 날카로운 말들로 속마음을 감추었을지도, 또 그런 일들을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아빠의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을 조금 더 너그럽게 이해해 주게 되었다. 단지 나의 지나친 예민함은 큰 키처럼 본래 타고난 것이라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며, 그저 천장이 낮은 곳을 지나갈 때는 조금 고개를 숙여 지나가는 방법을 배우면 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왜' 나는 남들보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 찾는 일을 멈추었다. '이유'보다는 현재 내 상태를 받아들이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면 의지도 하고,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두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달 내 생일 일주일 전쯤, 아침부터 아빠에게 문자가 왔다. 몇 주 만에 온 문자는 엄청난 양의 이모티콘으로 가득했다. 하트, 해, 무지개, 케이크, 웃는 얼굴, 돈, 기도하는 손 모양 등으로. 이모티콘이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을 더 잘 표현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지 이모티콘 외에는 어떠한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유난히 뭉툭한 아빠의 엄지손가락으로 갖가지 이모티콘을 고르고 골라 보냈을 생각을 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 그 속에는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아빠의 농담 섞인 말들이 숨겨있었다.


[ 우리 딸 생일 축하해. 좋은 하루 보내. ]
[ 조만간 볼 수 있으면 좋겠고, 돈 많이 벌어서 만나자. 복권 당첨되게 기도도 하고 ^^ ]


사실 그날은 나의 음력 생일도, 양력 생일도 아니었다. 아마 음력 생일과 양력 생일의 월, 일이 헷갈렸던 듯 보였다. 서운함보다는 평범한 9월 어느 목요일이 특별해진 기분이었다. 어쩌면 생일은 태어난 날짜 그 자체라기보다는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이렇게 널 알게 되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모든 날들일지도 모른다. 그날 아빠와 나는 이러한 문자를 주고받았다.


[ 이모티콘뿐인데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을 수 있네! ]
- [ 똑똑하군. ]
[ 아빠 닮아서. ]
- [ 사랑해 ^^]
[ 나도 ^^ ]


    나는 요즘 부쩍 내 입으로 '아빠와 닮아서'라는 말을 자주 내뱉는다. 나에게 그것은 더 이상 '죄목'이 아니다. 내가 아빠와 표정이 비슷하고, 같은 일에 짜증을 내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죄목의 '증거'가 아니다. 아빠의 말이나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아빠는 근래 그동안 가족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던 과거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가끔 전화로는 짜증도 내고 문자로 잔소리를 한다. 별것도 아닌 일에 불쑥 화를 낼 때도 있다. 여전히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마이클 프랭스의 'Mr.Blue'이고, 너무 뜨거운 밥이나 커피는 싫어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도와주기보다는 누워서 골프 채널을 볼 것이며, 한국으로 돌아오면 나는 다시 내 방을 아빠에게 반납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모든 것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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