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anna Nov 20. 2020

만성 우울증

우울증 일기 4

일전에 인터넷으로 검색해 둔 집에서 가까운 정신과를 무작정 찾아갔다. 살고자 하는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남자 친구 J의 조언은 내가 스스로 발걸음을 옮기는 데 큰 용기를 주었다. 


"문제가 있는 게 아니야. 그냥 너는 마음이 아픈 거야."


J를 만나기 전까지는 늘 나 자신을 '성격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마음이 아픈 사람'이라고 했다. 본인이 그것을 치유해 주고 싶다고 했다.


'네가 아직 나를 몰라서 그래.' 


마음속 벽을 세워두고 나는 알아듣는 척하고는 넘기기 일쑤였다. 그의 진심 어린 조언을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나의 우울증은 그를 만나고 나서 더욱 심각해졌다. 이전에 나는 언제든 상처 받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같았다. 지나치게 많이 의식하고 타인이 흘린 말투와 행동들을 굳이 분석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또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기 위해 나 자신을 원치 않는 곳으로 몰아갈 때도 있었다. 그는 나와는 정반대였다. 오로지 '나'라는 사람 외에는 무엇인가를 '의식' 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심지어 무심하고 차가운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기적인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는 사람이 남을 위해 살 수 있을까? 그가 진정으로 이타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나보다 크다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다. 

그와 함께 있으면 행복했고, 계속 웃음이 났다. 나는 그를 통해 내가 행복하지 않은 시간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처음으로 오랜 시간 짊어지고 왔던 우울함을 내려놓고 싶어 졌다.


    만성 우울증 진단이 내려졌다.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찾아간 병원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의 겨우 십 분의 일 정도를 꺼내 놓고 말이다. 감정 속에 깊이 빠져 허우적대느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두서없이 횡설수설했을 것이다. 내가 던져 놓은 마구 어질러진 말들의 틈바구니로 우울함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을 찾아주려 애쓰던 의사의 모습만 기억난다. (심지어 나는 당시 그가 젊은 30대 의사인 줄 알았지만 다음날 찾아갔을 땐 중년의 무게가 느껴지는 의사가 앉아있었다.)


"지금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뭘까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같은 것이 있는 건 아닐까요?" 


의사가 나에게 정해준 우울증의 원인은 '장녀로서의 책임감과 부담감'이었지만 맞는 얘기 같기도 하고 틀린 얘기 같기도 했다. 살아온 인생 얘기를 전부 하기에는 삼십 분이라는 상담 시간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우울증 진단을 받고 나는 한편으로 마음이 후련했다. 진작에 받았어야 할 것을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질병' 때문이라면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이러니한 희망도 보였다.  

    나의 희망찬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은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온전히 약에 의지하게 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약을 먹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도 불쌍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제 와 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후련하면서도 씁쓸했고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짓눌렀다. 뜯지도 않은 약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만성 우울증 진단으로 하나 주어진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나에게 '정당한 핑계'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나는 학교생활을 중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담당 교수에게 대학원을 그만두겠다는 요지의 이메일을 보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출장을 다녀와 막 공항에 도착한 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많이 힘드니?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처음 교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삼십 대 후반의 젊은 엘리트였고 뛰어난 논문 실적과 과거 대기업에서 수년간 일해온 경력으로 평판이 좋았다. 나는 그의 첫 제자로 연구실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열정이 넘치고 잠자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도 그에 발맞춰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늘 부족했고, 무엇보다 나의 체력은 그의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이튿날 집무실에서 만난 교수는 애써 태연하고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도 졸업은 하는 게 낫지 않겠니?"


예상했던 말이었다. 누가 보든지 간에 겨우 한 학기 정도를 남겨두고 학교를 그만두는 일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만성 우울증' 같은 것은 그에게 별로 와 닿지는 않는 모양이었지만 생각보다 단호한 나의 태도에 교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연구실에서 진행하는 연구 과제나 세미나 등에서 나를 제외하도록 해 기본적인 수업만 수강하고 졸업 논문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정도 제안은 교수로서 엄청난 양보였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나도 한발 물러서서 조금만 더 버텨보기로 했다.

    덕분에 전보다 심리적인 부담감은 일시적으로 줄어든듯했지만 수업에 나가는 것이 점차 힘들어졌다. 아프다는 사람에게 대놓고 욕을 하는 이는 없었지만 교수가 편의를 봐준다는 사실이 다른 학생들로 하여금 부당하다고 생각되었던 것 같다. 나는 과에서 성적 1등으로 조기 졸업을 할 정도로 학부 생활을 누구보다 성실히 했지만 그런 모습들은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사람들의 시선과 눈빛에서 나는 왠지 그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편의를 봐주겠다던 교수도 내가 약간의 기력을 회복하고 개인적인 과제들을 수행할 조짐이 보이자 새로운 과제들을 찾아줬다. 나는 점차 학교에서 설자리를 잃어갔고 고립되어갔다. 


    유일하게 곁에 있어준 건 J였다. 장거리 통학 생활이 힘들어 자취생활을 하며 집에는 2주에 한 번 정도 찾아갔다. 나의 숨길 수 없는 우울함을 자주 내비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내 모든 우울함을 꺼내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내가 어떤 얘기를 하든지 간에 무조건적인 내 편이었고, 미국 유학 생활과 몇 년의 휴학 기간으로 인해 늦어진 졸업을 준비하느라 빠듯한 와중에도 나를 만나러 오기 위해 버스로 두세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자주 오갔다. 무리하는 그에게 자주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잠이야 버스에서 자면 되고, 내가 좋아서 오는 거야."


나는 그가 불안감에 못 이겨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직도 장거리 연애를 하는 요즘 그는 나를 만나러 오기 위해선 몇 시간을 길에 버리면서도 여전히 비슷한 말로 나를 위로한다.


"얼굴 보면 그걸로 충분히 보상받아 나는. 너에게 쓰는 시간이나 돈은 하나도 안 아까워. 진짜야."


그는 나의 평생의 우울증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전 04화 나는 괜찮지 않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