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anna Nov 17. 2020

출근보단 퇴근이 힘들어서

우울증 일기 2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코가 매이는 시월 초 어느 날 아침, 조금은 두터운 긴팔 티셔츠를 꺼내 입은 나는 엄마가 걸어서 오분 거리로 출근하는 길을 분신 같은 맥북과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아무 책 한 권을 들고 출근하는 직장인 내지는 공부하는 학생인 양 따라나섰다. 본격적으로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한 지 3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 에어컨을 종종 트는 버스를 한 시간 가량 타고 사무실에 도착해 책상 정리까지 마쳤을 시간이었다. 나는 얼마 전 가까운 거리에 새로 개시한 꽤 규모가 있는 스타벅스 매장을 가는 길이었다. 혼자 집을 나서는 것보다 출근하는 엄마의 뒤를 잠깐이라도 따라 밟으며 가는 것이 나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따뜻한 거 마셔. 꼭.”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곳에 가더라도 어떻게든 걱정거리가 만들어지는 엄마였다. 엄마의 그런 노이로제 증상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빠와의 결혼생활과 강박증이 있는(적어도 내가 보기엔) 나의 외할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어떤 잔소리를 들어도 한 편으로는 이해하게 되었다. 덕분에 나도 ‘혹시 모르는 일’ 들을 걱정하는 것이 특기가 되긴 했지만. 어쩌면 인생이란 어떠한 목적도 없이 한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커피숍에 도착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듯 주문을 하고 이층 창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통 유리창으로 강렬한 아침 햇빛이 들어오고 한쪽 구석에는 건물 높이만큼 솟은 나무 풍경이 보였다. 자연스레 가방에 있던 이어폰에 손이 갔다. 이 호사스러운 순간에 음악이 빠질 수가 없다. 음악을 듣고 있자니 몇 달 전 엄마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왜 요즘은 음악을 안 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두 달가량을 음악을 듣지 않고 보냈다. 그렇게 괴롭던 출근길에는 이어폰을 두고 온 날이면 지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집에 돌아가곤 했다. 점심시간이나 잠시 틈이 날 때면 그때마다 옥상이나 회사 주변을 배회하며 음악을 듣는 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집에 칩거하다시피 보내는 날이 늘어나면서 어느 순간부터 음악을 듣지 않는 나를 알아본 엄마에게 선뜻 대답이 나서지는 않았다.


“좀 살만한가 보지 뭐.”


괜히 무뚝뚝한 말로 답을 대신했다.

    음악을 듣는 건 유일한 취미 생활이자 오래된 습관이었다. 나의 이런 습관은 지독한 멀미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차에 오를 땐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쥐고 타야 했고, 청심환을 먹고 귀에 붙이는 멀미약까지 더해도 효과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 지금은 좌석 버스 안에서 논문을 읽을 수 있을 정도라니 나도 가끔은 믿기지 않는다. 무슨 마법이 있었나 싶겠지만 나의 멀미를 덜어준 건 카세트테이프, CD 플레이어, 아이팟 그리고 지금은 아이폰이다. 백 원 동전 두 개와 오십 원 동전 한 개를 넣고 버스를 타고 다닐 때부터 후불 신용카드로 출퇴근 도장을 찍기까지 다양한 음악들이 귀에 울렸다 사라졌다. 음악을 들으면 아무것도 아닌 내 인생이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중독이었을지 모른다. 오십 대 중반인 엄마는 나와 아직도 음악 취향을 공유하는 사이이고 아빠는 젊은 시절 당신의 인생 곡인 ‘Mr.Blue’라는 이름의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으니 어쩌면 내가 이렇게 음악에 기대 살아온 건 이미 태생적으로 정해진 결과 같기도 하다.

    나는 아직도 새로운 사람과 친해질 때면 음악 취향에는 꼭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그것으로 사람을 분류할 수 있다는 나름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연애와 교류하고 있는 지인들을 놓고 볼 때 꽤나 높은 정확도를 갖는다. 특별히 누가 더 나은 음악 취향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나와 비슷한 부류인지, 독특한 취향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음악 따위는 절대 찾아서 듣지 않는 정반대의 부류인지 정도를 구분하는 선에서 활용하는 지표이다. 사람이나 인생을 때론 음악에 기대어 이해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이렇게 긴 시간 음악을 듣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나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작년 12월 정식으로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대외적인 이유는 ‘개인적인 건강 문제로 인한 퇴사’였다. 출근은 새벽 다섯 시에 몸을 일으키는 것으로 시작했다. 떠지지 않는 눈으로 잠을 깨기 위해 아침을 꾸역꾸역 먹고 나서는 밖으로 나가기 위한 치장을 했다. 내가 ‘치장’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지금 생각해도 그다지 통상적인 직장인의 외출 준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학원 시절 극심한 스트레스로 한층 예민해진 피부 탓에 화장하는데 유독 애를 먹었다. 최소 삼십 분에서 오래 걸릴 때는 한 시간 정도를 ‘치장’ 하는 것에 쏟아부었다. 귀한 아침 시간에 엄청난 낭비였던 셈이다. 나에게는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들을 생각했을 때 어쩔 수 없는 ‘투자’라고 생각했다. 

    여섯 시 반쯤이면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일곱 시 이후로는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들이 십 분마다 배로 늘어났기 때문에 일찌감치 집을 나서는 것을 택했다. 게다가 내가 다니던 회사는 출근 시간은 9시로 명시되어 있지만 8시 50분이 지나면 준 지각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이럴 바에 출근 시간을 8시 50분으로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차라리 나는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는 이미 사무실에 앉아 있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퇴근 시간에는 온종일 업무에 시달리다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집에 오는 버스를 길게는 50분가량 서서 기다렸고, 버스를 타고나서도 집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약 2년 6개월가량 매일 치러진 일과였다. 

    퇴사를 하기 무렵, 나는 사람이 가득 찬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혹은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었다. 출근하는 길은 그나마 버틸만했다. 만원 버스가 견디기 힘들면 일찍 일어나서 새벽 버스를 타면 그만이었다. 퇴근은 남들보다 삼십 분 일찍 하거나 저녁 아홉 시는 되어야 한산한 버스를 탈 수 있는데, 전자는 회사에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후자는 체력에 버거운 선택지였다. 

퇴근 후 나는 늘 지하에 설치되어 지하철과 접근성이 용이한 ‘버스 환승센터’에서 버스를 탔다. 서울과 인접한 여러 광역 시도로 향하는 버스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어 공간에 비해 사람들이 항상 넘쳐나는 곳이다. 버스 번호마다 정해진 게이트가 있지만 가끔은 나도 모르게 옆 게이트 버스의 줄을 뒤따라 서 있을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가 앞사람에게 기다리는 버스 번호를 묻는 것이 일상이 된 곳이기도 하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점점 늘어나 환승 센터 안에 뫼비우스의 띠가 만들어지면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이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꼈다. 한 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목표임은 버스가 도착하면 앞사람의 뒤통수에 코가 닿을 것처럼 간격을 좁히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버스를 타면 이어폰을 꽂고 밖으로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을 정도를 지키며 최대한 볼륨을 높였다. 그리곤 창밖을 보며 음악에 최대한 집중해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버텨야 했다. 창가에 앉지 못할 바에는 순서를 양보하고 다음 버스를 타야 마음이 놓였다. 그리 넉넉한 크기의 좌석은 아니었기에 옆 사람과의 거리를 두기가 힘들었는데, 특히 겉옷의 부피가 늘어나는 겨울철에는 옆 사람과 어깨 때론 팔뚝까지 기대며 가야 하는 것이 예민한 나에게는 가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한 일이었다.

    이어폰에 의지한 채로 한 시간 가량을 버티다 내릴 때쯤엔 숨이 막히고 머리의 혈관들이 조여 오는 듯한 괴로움이 밀려왔다. 서둘러 집까지 무사히 가야만 했다. 과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런 나의 병적인 증상들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다 보니 엄마는 차를 끌고 내가 내리는 버스정류장 바로 앞 마트 주차장에서 거의 매일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하지?"


엄마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다. 아마도 '말 한마디 할 힘이 없었다'라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차에 타면 숨을 돌려야 하는데 오히려 더 숨이 가빠 왔다. 그렇게 때론 아무 말 없이 집에 도착하고 나면 울먹이는 와중에도 먼지를 눌러쓴 찝찝함을 벗으려 옷부터 갈아입고 급히 손을 씻었다. 그리곤 달려가다시피 해 식탁에 올려져 있는 '입에 넣을 수 있는 것' 중 아무거나 입에 쑤셔 넣고 나서야 서러움과 안도감이 뒤섞인 눈물이 흘렀다.

    퇴근 무렵에나 나타났던 그런 패닉 증상이 그날은 한창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는 와중에 느껴졌다. 그다지 엄청난 이슈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늘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엄마에게 구조요청을 했다. 


[나 자꾸 눈물이 나는데 어쩌지...? 진정이 안돼.]


엄마와 문자를 나누며 조금은 이성을 되찾긴 했지만 더 이상의 업무 진행은 불가능했다. 자칫하면 그만둘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는 직속 상사에게 거의 통보를 하듯 조퇴를 하겠다 얘기를 하고 한 시간 정도를 버티다 사무실을 서둘러 나왔다. 그리곤 곧장 병원으로 도망쳤다. 그날이 내가 세 번째로 정신과를 방문한 날이었다.

이전 02화 신경정신과는 누가 가는 걸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