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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na Apr 11. 2021

안개

prologue

올해 여름에는 나와 남자 친구인 J 둘 다 직장을 다니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집에서 마음의 요양을, J는 이직 준비를 했던 탓이었다. 우리는 회사 눈치를 보며 하루 이틀 휴가를 내고 무언가에 쫓기듯이 가는 여행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휴식'을 찾아 떠나기로 했다. 여행은 매일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하고 싶은 일이었다. 한때는 여행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 옷으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는 항상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목표가 있었다. 

    물론 이번에는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의 범위가 국내로 한정되어 있었다. 나는 이십 년 전에 가족 여행으로, 약 십여 년 전쯤에는 수학여행으로 가본 적이 있던 제주도로 향했다. 이십 년 전은 거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고, 십 년 전쯤엔 삼일 내내 비가 왔었기에, 나는 무엇보다 날씨의 자비로움이 절실했다. 

    지난여름, 날씨는 무심하게도 우리가 제주도에 있는 5일 내내 비를 내렸다. 낮에는 자욱한 안갯속을 헤매고 밤에는 지붕 위 유리창에 떨어지는 강한 빗소리에 잠을 설치며 보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짙은 안개와 엄청난 습도를 몸소 체험하고, 결국엔 제대로 된 햇볕 한 번 쬐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제주도는 항상 비가 내리는 곳이었다.

    마지막 날, 우리는 렌터카 반납을 하는 곳에서 공항으로 돌아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비를 맞고 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집으로 가는 비행 편이 취소되지 않은 사실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았다. 칠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의 제주 공항은 이제 막 여름휴가를 시작하러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마스크 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사람들은 비가 오는 날씨쯤은 아무런 방해 요소가 되지 않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자니 집으로 가는 나와 J의 발걸음에는 못내 아쉬운 감정이 걸음걸음마다 묻어나는 듯했다. 

    J가 잠시 부모님의 선물을 고르러 면세점의 한 코너에 다녀오는 동안, 나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내가 앉은 의자 옆에는 두 개의 캐리어, 가족과 친구들에게 줄 간식거리와 선물이 담긴 쇼핑백 서너 개가 나란히 있었다.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내 앞쪽 의자와 옆쪽 의자에 나눠 앉았고, 내 의자 뒤에는 어린아이들이 바닥에 앉아 엄마에게 떼를 쓰고 울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꽉 막힌 마스크 안에서 숨이 점점 가빠 왔다.  나는 혼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안절부절못하다 옆에 나란히 세워두었던 쇼핑백들을 바닥으로 쓰러트리고 나서야 떨리는 손으로 J에게 전화를 했다.


    "살려줘.. 대체 어디 있어... 왜 이렇게 안 와..."


저 멀리서 J가 부지런히 내 쪽으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J를 보자마자 그를 책망하며 울부짖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내가 일말의 이성을 붙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미친 사람처럼 살려달라며 바닥에서 나뒹굴었을지 모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패닉 증상이었다. 나는 가방에서 선물용으로 사둔 파운드케이크 한 조각을 뜯어 입에 마구 욱여넣으며 눈물을 흘렸다. 

    여행은 직장 생활과는 달리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둔 것과는 별개로 나는 여전히 언제든지 끔찍한 공포감에 이성을 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전문적인'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나의 마음은 아직 안개 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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