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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na Nov 17. 2020

신경정신과는 누가 가는 걸까

우울증 일기 1

간호사는 열 장 안팎의 A4 용지 뭉치를 건네주었다. 정확히 오백육십육 문항. 짝수인지 홀수인지 혼동스러운 문항 수의 검사지를 받아 들었을 때는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오히려 신이 났다고 할까. 나 자신을 시험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신경정신과에서 전문가의 소견을 앞세운 것이라면 말이다. 


"생각나는 대로 답하시면 돼요. 예, 아니오로 표시하면 됩니다." 


'너에게 시간제한은 없지만 즉각 대답해야 해'라는 말로 들렸다. 집에서 찬찬히 문항지를 살펴보니 다행히 질문들은 대부분 곧바로 답을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렸을 적 좀도둑질을 해본 경험이 있다.' 
'나는 가족 구성원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가끔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상상을 한다.’ 


와 같은 질문들이었는데, 그중 오십여 가지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반복되는 질문들(거짓말 테스트인지, 기억력 테스트인지는 모르겠다) 도 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우울감이나 스트레스에 대한 문항보다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질문들이 상당수를 차지했기에 삼십 분 내로 작성한 답안지를 다음날 오전에 제출할 수 있었다. 

결과는 하루 더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나는 의사에게 어떤 소견을 듣더라도 담담하게 보이기 위해 온갖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악의 말들을 되새기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문항에 답하는 데 어렵지는 않았냐는 친절한 의사의 질문에 "정말 금방 했어요."라는 대답이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얼마나 솔직히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는지, 그 정도 질문의 양은 별거 아니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나 보다. 진실을 앞에 두고 마지막 방어기제였다고 해야 할까. 


"어... 우울감은 확실히 좀 있네요. 그래도 대부분 정상으로 나왔어요."


아무리 정신과 의사라도 우울증 진단을 내리는 일은, 게다가 일반적인 환자보다는 정신과를 찾는 환자이기에 어쩌면 더욱, 약간의 망설임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일인가 보다. 이 모든 게 단순한 우울증 때문인 걸까라는 생각과 함께 긴장이 늦춰지려 할 때쯤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대인관계가 많이 위축이 되어 있네요."


곁눈질로 맞은편 테이블에 올려진 검사 결과 그래프에 시선이 갔다. 하나의 좌표가 거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혹시 사람들 만나는 게 힘들거나 그러진 않나요?"


질문을 듣는 순간 '사람들'의 범주를 어떤 식으로 끼워 맞춰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최근에는 회사를 다니지 않아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서 잘 모르겠다는 말을 급히 내뱉고는 질문의 의도를 뒤늦게 파악을 해봤다. 조금 더 큰 범주의 '사람들'에 대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많은 곳에 가는 것이 불편하긴 해요. 혼자서 어딜 다니는 것도 힘들고요." 


내 말을 들은 의사는 조용히 펜을 들고 메모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질문을 이어갔다.


"예전엔 무기력감이 심했던 것 같은데 요새는 어떤가요?"


"무기력감은 좀 덜한데.. 불쑥 화가 나고 별거 아닌 일에 자꾸 눈물이 나요. 제가 너무 예민해서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해서 오게 됐어요.”


의사는 끝까지 친절한 말투를 유지하며 모든 증상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으니 충분히 나아질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일주일 치 약을 처방해 주었다.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를 처방받고 병원 건물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은 처방받은 약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벼웠다. 과연 이 작은 알약으로 불완전한 마음을 얼마나 치료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마음을 치료한다는 건 나의 어리석은 착각이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건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온전히 잠에서 벗어났다고 하긴 어려웠다. 전날 밤, 약을 먹고 삼십 분 뒤 급격히 몰려오는 졸음에 잠이 들었다. 처음엔 많이 졸릴 수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열두 시간가량을 내리 잘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딱히 정신을 차리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순히 잠이 쏟아졌고 하루를 그렇게 흘려보냈다. 다음 날부터는 졸림이 덜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아무 생각 없이 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평소 하던 일들도 해내기 어려웠다. 입맛도 없어 살기 위한 의무감으로 음식을 먹었다. 몸은 뇌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낀 순간이었다. 조금씩 차도는 있었지만 그렇게 일주일을 몽롱한 상태로 보내고 어느덧 다시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이제는 좀 겁이 났다.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먼저 권유하던 엄마는 덩달아 겁이 난 듯했다. 일주일 동안 내 딸이 없어졌다며, 차라리 울고불고 화내는 딸을 돌려 달라고까지 말했다. 정식으로 하는 약물 치료는 처음이었기에 아직 어떤 약이 나에게 맞는지 모르며, 의사와 잘 상담해보겠다는 말로 엄마를 안심시키고 난 후 병원으로 향했다.


    정신과를 방문하는 일이 이비인후과나 피부과를 방문하는 것만큼 익숙하지는 않았다.  내가 다녔던 병원은 한 동네 상가 건물의 3층에 위치해 사람이 북적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복도를 따라 여러 편의 시설들을 제치고 맨 끝에 다다른 뒤에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한 층이 전부 정신과였다 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곳이 아니라는 게 씁쓸한 위안이었다. 병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대기하는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하곤 했는데, 내가 방문하는 시간에는 줄곧 다행스럽게도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가끔 아버지뻘의 아저씨나 할아버지, 아들과 같이 오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날은 유독 엘리베이터를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 레깅스와 티셔츠를 입은 스무 살 남짓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같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그녀는 운동복 차림에 걸맞게 낮은 스니커즈를 신고 검은색 야구모자와 반쯤 먹은 생수병을 들고 있었다.  '이 건물에도 헬스장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녀는 재빠르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후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탑승하자마자 '닫힘' 버튼을 엘리베이터 문이 실제로 닫힐 때까지 대여섯 번 정도를 연달아 눌러댔다. 그리고 고작 두 개의 층을 이동하는 동안 스마트폰 화면을 한 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정신과에 방문해야 하는 건 저런 사람이 아닐까 하고. 

    잠시 뒤 그녀는 나와 같은 층에 내렸다. 그녀가 약국과 안과 등을 제치고 내가 다니는 정신과 문 앞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놀랍게도 그녀는 소파에 앉아 본인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를 의아하게 느끼던 것도 잠시, 그녀를 진료실로 보내야 했고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동안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내가 정신과를 다닌다는 사실을 선뜻 말하기 어려웠던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처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필히 오해의 소지가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병원을 다니고 있는 나조차도 나보다 어린 여자가 정신과에 앉아있는 걸 보고 놀라지 않았는가.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늘어지는 틈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진료실 바깥까지 들렸다. 정확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꽤 우렁찬 목소리로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듯했고,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렸다.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별일 없다는 듯 곧바로 진료비를 계산하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 뒤를 이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일주일 약을 먹고 나서의 상태가 어떤 지부터 확인했다. 약을 먹고 지내는 동안 내내 잠이 쏟아졌다는 말에 매우 놀란듯했다. 하루에 두 알의 항우울제를 먹도록 처방받았는데 한 알만 먹어도 충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졸리거나 다른 증상이 있다면 다른 약을 먹어보자고 했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평소보다 의사에게 무슨 말이라도 더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이전보다 가슴이 답답하고 그런 건 좀 덜하긴 해요. 그리고..."


나는 끝까지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의사는 단호한 어투로 급히 설명을 이어갔다.


“항우울제로 처방해 드린 약은 그런 증상과는 상관없어요. 별도로 필요시에만 먹도록 쓰여 있는 반 알자리 아시죠?  가슴이 답답하고 힘들다 싶으면 그때 그 약을 드시면 돼요. “


그러면서 의사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정신과를 찾는다고 했다. 원인은 연애, 학업, 업무, 사람과의 관계 등의 이유이고 대부분 약을 먹으면 금방 호전되는 경우를 자주 봐왔다며, 본인이 꾸준히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취미와 운동이 있다면 누구든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실 뒤이어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급히 마음을 돌려 빨리 병원을 빠져나오는 것을 택했다. 의사도 겨우 일주일 약을 먹은 환자에게 더 자세한 얘기를 들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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