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의 단편집
('익명게시판(5)'에서 이어짐)
[조직 문화 개선을 위한 전사 토론회]가 끝난 후 익명게시판의 트래픽은 게시판이 만들어진 후 최대치를 찍었다. 한 때, 접속이 불가할 정도였다. 토론회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게시판 접속은 정상화됐다. 김현주 전무는 토론회와 관련된 제목들을 하나하나 클릭하며 정독했다. ‛이런 토론회를 주최했다는 사실부터가 회사가 바뀌려고 노력한다는 증거다’는 내용이 꽤 보였다. 인사팀에는 긍정적인 글들이었다.
한편 실명을 거론하며 인신공격 형태로 쓰여진 글들도 적지 않았다. 당연히 공격의 대상은 최민수 차장이었다. 토론 내내 조용하다가 마지막 몇 마디로 그는 회사 전체의 적이 된 것처럼 보였다.
- 인사팀에서 사람 심었네.
- 진짜 꼰대가 패널로 등장했다!
- 인상부터 답답하게 생겼더라.
- 저런 사람들 때문에 회사가 이 모양.
김현주 전무는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그렇게 반나절을 보내고 오후가 될 때쯤 게시판 글들의 수위는 강도가 높아졌고, 이내 육두문자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비난의 화살이 날아가도 누군가를 특정하진 않았던 지금까지의 게시판 분위기와는 달랐다. 최민수 차장이라는 사람이 언제 입사했고, 어떤 부서에 있었고, 어떤 일을 했으며, 지금은 부서에서 어떤 사람인지까지 구구절절 적히기 시작했다.
김현주 전무는 급히 자리의 전화기를 들고 최민수 차장이 소속된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팀장? 김현주예요.”
“아, 전무님. 안녕하십니까.”
“최민수 차장인가, 그 사람 지금 자리에 있나요?”
“네에, 있습니다.”
“그 사람, 지금 어때요? 팀에 문제 있는 건 아니죠? 사무실에도 아무 일 없고?”
이 팀장은 잠깐 멈췄다가 답했다.
“음... 지금 봤을 때는 평상시랑... 별다른 건 없습니다.”
“알겠어요. 왜 물어보는지 알죠?”
“네, 전무님. 게시-”
“혹시 문제 생길 거 같으면 외근 보내거나, 일찍 퇴근시키세요.”
“알겠습니다, 전무님.”
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다시 전화를 들고 익명게시판 담당자를 인사팀으로 호출했다. 그리고 팀의 부장을 같이 회의실로 불렀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어, 배 과장. 게시판 실시간으로 계속 보고 있지?”
“예.”
“보면 알겠지만 수위를 넘네요, 알죠? 이거 사장님이 보시면 복잡해질 거야.”
“예.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글 몇개를 임의로 삭제할 수도 없고요.”
김현주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글을 지우라는 게 아니에요. 심하다 싶으면 익명게시판 차단해버려요. 내가 하루종일 게시판만 보고 있을 수 없으니깐 배 과장이 판단해도 괜찮아.”
“그렇지만... 차단하는 건 그것대로 더 문제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제도 트래픽 초과로 막혔었잖아? 어차피 직원들은 왜 닫혔는지 알 수 없을 테니깐 일단 막는 게 나아요. 저렇게 쌍욕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알겠습니다.”
담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현주 전무는 같이 자리한 인사팀의 김 부장에게 말했다.
“김 부장은 오늘 다른 업무는 팀원들한테 넘기고 익명게시판만 계속 모니터링하세요. 여기 배 과장이랑 수시로 연락 주고받으면서 문제되겠다 싶으면 같이 판단해서 게시판 막아버리라고. 악플 때문에 사람이 죽는 세상이야. 옆자리, 뒷자리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누구 하나 이렇게 날 잡았다는 식으로 때리고 있는데... 이거 잘못되면 우리가 책임져야 돼.”
김 부장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쪽 팀장한테는 미리 전화해 놨어. 그 사람한테 문제있거나 팀에 뭐 이상한 일 생길 거 같으면 아예 그 사람 외근보내거나 퇴근시키라고. 내가 오후에 다른 회의 있어서 계속 게시판만 보고 있을 수 없으니깐 두 사람이 꼭 잘 챙겨줘요.”
“네, 전무님.”
*
김현주 전무는 다른 층에 잡혀 있는 회의 일정 때문에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나가는 몇몇 직원들이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직원들은 늘 그렇듯 조용하고 엄숙하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익명게시판에서는 폭동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데, 정작 사무실은 언제나 그렇듯 깨끗하고 조용했다.
일정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김 부장이 문을 두드렸다. 김현주 전무는 살짝 긴장했다.
“전무님, 게시판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습니다.”
“무슨 말이지?”
“제가 길게 말씀드리는 것보다 직접 쭉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김 부장은 그녀의 컴퓨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현주 전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 부장을 손짓으로 내보냈다. 그녀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익명게시판에 접속했다. 그리고 뭐가 이상해졌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 품위 좀 지켜라, 못 배운 놈들도 아니고.
- 이런 수준이면서 무슨 조직문화를 바꾼다고...
- 사람 한 명 물어 뜯으니 신나지?
- 최민수 그 사람 말 틀린 것도 없더만. 난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했음.
일종의 반작용일까. 김현주 전무가 익명게시판을 볼 수 없었던 몇 시간 동안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뀌고 있었다. 최민수라는 사람을 비난하는 여론이 극단적으로 치닫고 인신공격에 이른 모습까지가, 게시판 담당자와 김 부장을 호출했을 때의 상황이었다.
최민수 차장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게시판 분위기 때문에 혹여 ‛꼰대’로 낙인찍힐까 내색하지 못했던 직원들, 젊은 세대 위주의 문화가 회사의 발전에는 오히려 해가 된다고 속으로만 생각했던 직원들의 의견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익명게시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극소수의 고지식한 의견들은 있긴 했다. 이런 의견들은 그동안 손쉽게 무시됐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달랐다. ‛고지식한’에 해당되는 의견들이 매장되기는 커녕, ‛좋아요’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김현주 전무는 김 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게시판 그냥 둬도 되겠네.」
김현주 전무는 사장에게 보고할 내용을 빠르게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급변한 게시판의 상황 덕분에 ‛이러이러한 반대의 의견들도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라는 문장까지 적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자 한층 마음이 놓였다.
('익명게시판(7)'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