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인석 Oct 15. 2024

익명게시판(5)

루카의 단편집

('익명게시판(4)'에서 이어짐)


 무대에서 토론에 참여할 직급별 대표 패널들이 선정됐다. 각 팀에서 최종 선정된 패널 명단을 보내줬고 김현주 전무는 그들의 인사카드를 확인했다. 튀는 직원들이 꽤 많이 뽑혔고 ‛위험인물’도 몇 명 포함되어 있었다. 노조 활동을 하고 있는 직원, 회사의 비리를 언론에 폭로한 후 한직을 떠돌고 있는 직원, 부서장에게 진급 불가 인력으로 낙인찍힌 직원까지 위험의 종류도 다양했다. 김현주 전무는 아예 마음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토론회는 그야말로 “현재의 회사 문화를 대놓고 혼내 달라!”고 마련한 자리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보고를 했으니 진행해야 하는 일 아닌가. 익명게시판을 현실로 옮겨서 젊은 직원들의 불만을 한번 크게 해소시키는 자리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대강당 입구부터 행사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방청객으로 온 여러 직원의 표정에서 설렘이 보였다. 젊은 직원들은 환한 웃음을 띠고 준비된 다과와 커피를 든 채,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며 강당으로 하나둘씩 들어갔다. 이쯤되면 일단 외관은 김현주 전무가 보기에도 웬만한 글로벌 기업들처럼 자유로운 모양새였다. 토론회에서 얼마나 날카롭고 적나라한 이야기가 쏟아질지 각오해야 했지만, 시작 전까지의 모습은 사장의 의도를 거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전무님! 사장님이 뒷문으로 와서 이미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강당 내부의 행사를 준비하던 직원이 헐레벌떡 김현주 전무에게 뛰어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강당 안으로 표정을 찡그리며 뛰어 들어갔다. 사장의 의전을 위해 준비시킨 팀원들의 동선이 꼬여버렸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준비되지 않은 자리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사장이 김현주 전무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 김 전무. 고생이 많아요.”

 “말씀이라도 하고 오시지 그러셨어요. 입구에 커피도 있습니다, 사장님.”

 “아, 그래? 잘했어, 잘했어. 그런 거 챙겨 놔야지.” 

 “사장님, 자리도 여기 아니세요. 저쪽입니다.”

 “아무 데나 앉으면 안 될 게 뭐 있나? 여기 그냥 앉을게.” 

 김현주 전무는 행사를 준비 중인 팀원 한 명을 손짓으로 불러서 원래의 사장 자리에 준비한 간이 테이블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러자 사장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런 거 막 챙겨두는거 트렌드 아니야, 이제는. 앞으로는 저런 거 준비시키지 마세요. 그거 테이블 치워도 돼. 거기 있는 물만 줄래요?” 

 테이블을 들고 오던 팀원이 그 자리에 테이블을 두고 물병만 사장에게 건넸다. 

 임원들도 하나둘씩 대강당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임원들은 사장과 김현주 전무 쪽으로 다가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김현주 전무는 그들에게 눈짓했고, 임원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붙어있는 지정석으로 가서 앉았다. 


 예상대로 토론회는 날 선 지적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가운데 앞쪽 자리에 나란히 앉아있는 경영진들을, 패널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종종 방청석에서 박수 소리도 나왔다. 박수 소리가 나오는 주제에서 경영진들의 표정은 좀 더 일그러졌다. 

 수직적이고 고지식한 회사 문화에 대한 비판은 익명게시판에서 이미 수십 차례 지적됐지만, 얼굴을 직접보고 듣는 것과는 또 달랐다. 진행자는 격앙되는 분위기를 제지하기 위해 자주 끼어들어야 했다. 토론 내용을 메모하는 인사팀의 타이핑 소리는 분위기가 격앙되거나 박수 소리가 커질수록 빨라졌다. 김현주 전무도 몇 가지를 메모하며 한숨을 쉬었다. 패널들의 토론과 방청객의 질문에 가끔씩 사장도 고개를 끄덕였고, 몇 가지 주제에는 마이크를 들어 직접 대답하기도 했다. 사장에게 질문이 갈 때마다 김현주 전무는 조마조마했다. 사장에게 용감하게 던져지는 질문들 때문에 조마조마했고, 사장이 어떻게 대답할지 조마조마했다. 사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결국 인사팀의 업무나 마찬가지였다. 


 한 시간 반가량의 토론회가 마무리될 즈음, 김현주 전무의 메모에는 이런 내용들이 적혔다. 

 - 공정한 고과 평가 

 - 회사 이익과 비례하는 연봉 인상 필요

 - 다양한 노조 지원

 - 자율출퇴근제, 복지 확대(경쟁사 수준으로)

 - 직급제 폐지

 실행 불가능한 메모를 보며 김현주 전무는 침을 삼켰다. 진행자는 패널들에게 마지막 멘트를 제안하며 토론회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네, 다음은 최민수 차장님. 오늘 토론회에 대해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다른 패널들에 비해 거의 말씀을 안 해주셨는데요, 카메라도 있고 방청객도 많아서 긴장을 많이 하셨나 봐요.”

 김현주 전무는 다시 무대로 눈을 돌렸다. 인사카드에 별다른 내용은 없었던, 진급 누락 3회 후 최근에서야 차장으로 진급했다고 쓰여있던 직원이다. 그는 마이크를 잡았다.


 “다들 불만들만 많으신 것 같습니다.” 

 순간 대강당이 조용해졌다. 


 “회사생활 하면서 완벽히 만족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저는 지킬 건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여기 무대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나 게시판에 올라오는 이슈들, 대부분이 실현하기도 어렵고 공감도 잘 안 됩니다. 회사는 취미활동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직급이나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출퇴근 시간을 마음대로 한다고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요? 그렇게 일하면 회사를 다닐 필요가 없지 않나요? 프리랜서랑 뭐가 다릅니까? 다른 이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성이 전혀 없어요.”

 조용한 분위기는 아예 싸늘해졌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회사는 선배님들과 경영진의 경험으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의 후배들은 경험을 쌓으며 선배가 되겠죠. 그 과정 없이는 이렇게 큰 강당도, 지금 들고 계신 커피나 간식도 준비하기 어려운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겁니다.”

 다른 패널들이 말을 끝낼 때는 박수가 나왔지만 최민수 차장이라는 패널이 말을 마쳤을 땐 적막함이 유지됐다.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던 임원 몇 명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말이 끝났는지 아닌지 모르게 최민수 차장은 마이크를 놓았고 정신을 차린 진행자가 황급히 다음 패널에게 마이크를 권했다. 하지만 방청객과 임원들, 그리고 사장까지 최민수 차장이라는 패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김현주 전무는 급히 실시간 채팅창을 스마트폰으로 켰다. 채팅창 올라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 저 사람 뭐야?

 - 뭐지 갑분싸.

 - 분위기 모르네? 저런 사람이 왜 패널이 된 거야?

 - 인사팀 프락치인가요?

 진행되는 내내 고조되어 있던 토론회는 한 패널의 발언 때문에 다소 가라앉은 기이한 분위기로 마무리됐다. 사장은 김현주 전무에게 수고했다고 인사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강당의 방청객들은 삼삼오오 토론회 이야기를 하며 문밖으로 나섰다. 인사팀원들은 강당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패널들도 무대에서 내려왔다. 임원들도 서로 악수를 하며 흩어졌다. 임원 중 몇 명은 무대에서 내려오는 패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특히 최민수 차장을 붙잡고 몇 명의 임원들이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김현주 전무는 멀리서 볼 수 있었다. 


('익명게시판(6)'에서 계속)

이전 14화 익명게시판(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