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의 단편집
('익명게시판(3)'에서 이어짐)
새로 부임한 사장은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똑똑했다. 똑부 상사, 똑똑하고 부지런한 상사가 이토록 힘들다는 걸 김현주 전무는 뼛속 깊이 체감하고 있었다. 새로 온 사장이 반년 동안 자주 썼던 단어들을 쭉 나열하면 ‛요즘’, ‛젊은’, ‛트렌드’, ‛MZ세대’, ‛문화’ 등이었다. 사장이 사례로 제시하는 사업들은 대부분 젊고 빠르고 핫한 회사의 성과들이었다. 사장은 부임 첫날부터 청바지를 입는 파격을 선보였고 각 층을 혼자서 수시로 방문했다. 타이트하고 어두운 계열 정장차림으로, 적어도 너덧 명의 수행 임원과 함께 다니던 전임자와는 판이했다.
덕분에 인사팀장 김현주 전무의 업무강도는 두세 배 늘었다. 사장의 ‛소통 강조’ 행보 때문에 팀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경영진과의 논의를 거쳐 탄생시킨 익명게시판은 김현주 전무가 완수한 첫 번째 대형 임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익명게시판은 사장 마음에 쏙 들었다. 사장은 인사팀을 직접 종종 방문하며 김현주 전무에게 툭툭 아이디어를 던졌다. 그녀는 30년 동안의 회사생활을 하면서 “그건 어려운 일입니다.”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부사장 다음가는 자리는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사장의 아이디어는 던져진 후 금세 현실화되곤 했다. 사무 공간을 더 젊은 느낌으로 바꾼다거나 복장을 유연하게 개선하는 등의 아이디어들이었다.
‛회사는 회사다워야 한다’는 김현주 전무의 모토에 모순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가 회사다우려면 그녀는 사장의 지시를 전적으로 따라야 했는데, 사장의 지시가 회사를 회사답지 않게 만드는 요소처럼 느껴져서 자주 혼란스러웠다.
사장은 지시가 잘 이행될 때마다 인사팀으로 쓱 내려와서 칭찬을 해주고 지나갔다. 김현주 전무는 이 모습조차 ‛이게 맞나?’는 생각을 자주 했다. 무려 사장이다. 조금 더 무겁게 굴어야 하지 않냐는 생각이 사장 부임 후 반년 동안 끊임없이 김현주 전무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회의실에 팀원들이 모였다. 사장이 또 아이디어를 던져줬다. [회사의 문화 개선]을 위한 ‛크고 그럴듯한 행사’를 진행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김현주 전무는 동의할 수 없는 행사였지만 그 또한 사장의 지시였다. 팀원들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곳이 회사인지 대학교 동아리인지 가늠이 안가는 기획안들이었다. 한 시간여 동안 진행된 회의를 통해 전사적 규모의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대강당에 방청객을 받고 영상으로도 중계한다. 실시간 채팅창도 준비한다. 무대에는 직급별로 한두 명씩의 대표 패널들이 올라간다. 유연한 사내 문화 조성을 위한 토론회인 만큼 패널 선정은 각 팀원들의 투표를 통해 투명하게 선정한다. ‛회사의 문화’를 주제로, 여러 창구를 통해 세부 안건들을 미리 받아놓고, 패널들은 그 주제로 토론을 진행한다. 방청객들은 채팅창과 현장 질문을 통해 참석할 수 있다. 도출된 결론들은 인사팀에서 사내 규정으로의 반영을 추진한다. 대강당 입구에는 글로벌 기업들처럼 커피나 형형색색의 다과를 준비하고 경품 이벤트 같은 소소한 행사도 덧붙인다. 여기까지가 구체적으로 도출된 진행 방안이었다.
김현주 전무는 한숨만 푹 내쉬고, “그렇게 합시다.”라는 말로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사장은 대면 이외의 보고 창구를 다양하게 활용하라고 했다. 글로벌 기업들은 그렇게 소통한다고 했다. 사내 메신저로 ‛슬림하게’ 하는 보고를 적극 권장한다고, 사장은 말했었다. 김현주 전무는 전사 토론회 진행건의 보고를 메신저로 작성했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인사팀장 김현주입니다. 점심은 맛있게 드셨는지요? 지시하신 행사는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전사 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행사는 영상과 현장 진행을 병행하며, 실시간 채팅창과 현장 질문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무대에는 직급별 두 명씩의 패널이 올라가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세팅하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행사 예고를 전사에 게시하고, 토론 패널 및 안건 선정을 거쳐 2주 후 토론회를 개최하겠습니다.」
여기까지의 문구를 쓰는데 30분 정도가 지나갔다. 김현주 전무는 마무리 인사를 어떻게 쓸지 고심에 빠졌다.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럼 오후도 평안히 보내십시오.’라고 마무리 지었다. ‛즐겁게’라는 단어를 쓰려다 회사가 노는 곳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 ‛평안히’로 고쳐 썼다. 메신저 창에 길게 적혀진 내용을 여러 차례 눈으로 훑으며 오타가 없는지, 문장이 잘 읽히는지를 확인했다. 십수 번의 검수를 거치고 나서야 김현주 전무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익명게시판(5)'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