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의 단편집
('익명게시판(6)'에서 이어짐)
토론회 후로도 나의 [자체 파업]과 [존대 조치]는 유지됐다. 직원들에게 토론회가 얼마나 회자됐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아마 익명게시판에 토론회 얘기가 많이 올라왔겠지만, 애당초 차장 승진 후부터 단 한 번도 게시판을 들어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아무리 익명게시판에서 떠들어봐야 회사는 똑같이 돌아간다. 다들 겉으로는 어떤 파격적인 행동도 못 하면서 익명게시판에서만 잔 다르크나 체 게바라가 된다. 토론회 전에도 게시판이 시끄러웠던 것처럼 토론회 후에도 게시판은 시끄러웠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토론회 전에도 사무실은 조용했고 지금도 조용하다.
우리 층에 경영관리팀장이 찾아왔다. 본체만체 하고 있었는데, 우리 팀으로 오더니 팀장과 잠깐 인사를 나누곤 나에게 와서 손을 건넸다.
“최민수 차장? 나랑 차 한잔하지?”
“요즘 일은 어때?”
“별일 없습니다, 상무님.”
“팀에서 괴롭히지는 않나?”
“네, 전혀요.”
경영관리팀장은 의외라는 듯 으쓱하더니 물었다.
“자네, 요즘 혹시 게시판 보나?”
나는 실소를 금치 못하며 답했다.
“최근에는 한 번도 안 봤습니다. 일하는데 별로 도움 안 됩니다.”
대답하면서 경영관리팀장과 눈을 마주쳤는데, 그제야 그를 어디서 봤었는지 기억이 났다. 대강당에서 있었던 그 토론회 때, 끝나고 나가던 나를 붙잡고 수고했다며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임원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최 차장이 혹시 우리 팀에서 같이 일할 수 없을까 의견을 물어보려 온 건데. 어때?”
“저는 프로그래밍만 하던 사람인데... 제가 갑자기 경영관리팀을요?”
“나는 솔직히 그 토론회 때 당신 말에 많이 공감했거든. 일 잘하는 친구들이야 널렸지. 근데 말이야, 최 차장. 내가 회사생활 20년 넘었거든. 회사생활 오래 해보니깐 회사가 잘 돌아가려면 철학을 가진 녀석들이 필요해, 철학. 최 차장 당신이 그때 말하지 않았나? 지킬 건 지켜야 된다고. 맞는 말이야. 근데 이상하게 요즘 회사가 지킬 거 지켜야 된다고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돼 버렸어. 회사가 어디로 가는 건지...”
경영관리팀장은 본인의 회사생활 무용담을 쭉 늘어놓고는 말했다.
“이봐요, 최 차장.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밑에 파트장 하나가 곧 퇴사할 거야. 당신 차장 승진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됐지? 누락 몇 번 있어서 일찍 부장된 사람들이랑 비슷한 기수라고 들었는데. 3/4분기 인사발령 때 우리 팀으로 와서 파트장 맡아. 파트장 직책 먼저 달고 연말 인사발령 때는 부장까지 달아줄게. 차장에서 부장까지 반 년밖에 안 걸리는 건 당신이 처음일 거야.”
그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던져 놓고는 한번 생각해보라는 말과 함께 돌아섰다. 그동안 멀어졌던 회사 생활에 대한 욕심과 열정이 슬며시 피어올랐다.
*
새 부서에서 두 명의 직원이 찾아와 짐을 새 자리로 옮겨주었다. ‛혁신파트’를 맡게 됐다. 파트원들이 모여있는 회의실에서 첫 대면식을 했다. 경영관리팀장이 들어와서 나의 이력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해주었다. 그는 소개 후 나에게 인사를 시켰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파트장으로 일하게 된 최민수입니다. 혁신파트를 맡게 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회사의 무엇을 ‛혁신’할 것이냐. 회사는 회사다워야 합니다. 지킬 건 지키면서 회사의 탄탄함이 유지되도록 ‛혁신’하자, 이것이 제가 파트장으로서 해야 될 일이라고 정했습니다. 다들 잘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평직원일 때보다 두 배는 넓어진, 창가와 붙어있는 새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혁신파트장 명패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자체 파업]은 아까 새 부서원들과 첫인사를 나누며 종료됐다. 이제 예전처럼 열심히 일할 것이다. 회사를 정상적인 방향으로 ‛혁신’하는 일이 첫 번째 중대한 임무라고 다짐하면서 새로 받은 컴퓨터를 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