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PROJECT
영화 <월-E>는 황폐화를 거듭해 쓰레기로 가득 차게 된 지구가 배경이다. 인간이 살고 있지 않은 미래의 지구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로봇 이름이 바로 월-E다. 수 백 년의 시간 동안 쓸쓸히 쓰레기만으로 뒤덮인 지구에 남아 성실하게 청소라는 업을 수행하는 로봇 월-E. 귀엽고 매력적인 이 로봇을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볼거리가 있을까.
요즘엔 좀 덜하지만 대중문화에서 애니메이션류는 다소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다. 혹은 '어린이용'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물론 이는 1차원 적인 생각이다. 애니메이션들도 깊이가 상당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여러분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여러 애니메이션들도 이런 '명작'에 해당될 듯하다.
오늘 이야기할 픽사의 영화 <월-E> 또한 이 범주에 속한다. 당장 '네이버 영화'의 별점만 봐도 여러 명작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단지 주인공들이 매력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회자되는 건 아니리라. 영화 제목과 동명인 주인공 로봇의 모험과,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있는 여러 교훈들은 깊은 울림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사랑스러운 로봇 월-E와 이브, 그리고 지구를 떠나 있어야 했던 인간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공지능 이야기를 나눠보자.
'Waste Allocation Load Lifter Earth-Class'의 약자를 이름으로 쓰는 '월-E'는 이름 그대로 쓰레기 처리 로봇이다. 작품의 설정상 지구는 쓰레기로 가득하게 됐고, 인류는 쓰레기 처리를 전담할 양산 로봇을 만들어 임무를 준 뒤 지구에서 떠나 있게 된다.
작품에는 700여 년 동안 양산형 월-E들의 흥망성쇠가 다 드러나진 않지만, 적어도 주인공 월-E가 약인공지능에서 강인공지능화 되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몇몇 장면들에서 다른 양산형 월-E들의 파손된 모습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쓰레기 처리라는 단순 작업을 수행하기에 최적화돼있던 월-E들은 격한 환경의 변화나 위험상황에서 서서히 동작을 중지한 듯하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유일한 월-E, 즉 '제품번호 62675호 월-E'는 오랜 세월 동안 쓰레기 처리라는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스스로 생존력을 계속 연장해갔다. 그 과정 속에서 그는 다른 월-E들과는 다르게 공포나 즐거움 같은 감정을 습득한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애완동물로 바퀴벌레까지 기른다. 그의 본업인 쓰레기 처리를 수행하면서도 인간과 같은 감정을 보여준다.
인공지능을 얘기할 때, 거의 9할은 현세대의 '컴퓨터공학'에 해당한다. 컴퓨터공학이 발전하고 또 발전하여, 인공지능의 토대를 이뤘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수긍이 간다. 하지만 컴퓨터공학=인공지능학이라는 공식까지 연결될 수 있을까.
유튜브에 영화 '어벤져스'를 검색하면 '아이언맨의 슈트 착용 씬' 같은 영상이 꽤나 많이 뜬다. 사람들은 '자비스의 전능함' 그 자체보다도, 기계의 움직임이 사람과 결합하는 슈트 착용 장면에 큰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돌아보면 자비스는 [형체가 없는 프로그래밍 코드의 집합체]지만, 이것이 형체화되어 [슈트의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슈트는 토니 스타크의 몸에 '윙- 철컥' 등의 철제 소재 특유의 소리를 내며 결합하고 변신한다. 자비스의 지시나 권유는 컴퓨터공학이지만 기계 소재들이 움직여서 스타크의 몸에 결합하고, 여러 무기들을 꺼내며 동작하는 행위는 오히려 기계공학과 물리학에 더 밀접하다.
귀염둥이 월-E에게 돌아와 보자. 월-E는 그 누구의 지시도 따르지 않는다. 아니, 사실 지시할 자가 없어져 버렸다. 이미 황폐화된 지구에 월-E를 통제하는 건 오직 단 하나, 입력되어 있는 미션(쓰레기 처리) 뿐이다. 지시할 주체가 없어진 대신에 월-E는 스스로 행동을 정해서 움직이다. 월-E의 CPU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철저히 기계공학 집약체로서 동작한다. 양쪽에 세 개씩 달린 바퀴에 궤도를 끼워서 움직이고, (집에 오면 궤도를 벗어서 걸어놓기까지 한다. 마치 신발을 신고 벗듯이!) 네모난 모양의 본체에 자신의 눈과 손, 발(=궤도 바퀴)을 넣어 정육면체 모양으로 변하기까지 한다. 쓰레기 처리를 위해 팔을 움직이고 몸속으로 쓰레기들을 움켜 넣어 압축하는 동작까지. 그의 행동은 모두 기계공학이다.
자동차 공장을 떠올려보자. 기계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굴리고 자동차를 조립하고 도색한다. 그 기계들을 '로봇'이라고 부른다. 2020년의 공장은 상당한 자동화를 이룬 상태다. 자동으로 공장 내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제한다. 소속된 로봇들에게 적절한 명령어를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이 없으면 공장 운영은 정지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형체'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들은 컴퓨터 내의 검정 화면 속 촘촘한 명령어로 존재한다. IT 개발자들이 '코드'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하지만 명령어들만 존재하고 동작하는 기계들은 싹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코드는 존재하기 때문에 공장은 멀쩡한 것일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장은 정지한다. '행동'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기계들의 범위.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물리적 움직임'. 움직임들은 비록 명령어들의 통제를 받지만 '보여진다'. 실존하는 그 모습과 실재하는 동작, 컴퓨터공학의 코드'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기계공학이다.
컴퓨터공학보다 기계공학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공학과 기계공학이 서로를 보완해주지 않으면 우리가 상상하거나 영화 속에서 보는 인공지능의 모습은 실재화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인공지능은 컴퓨터공학의 끝판 학문처럼 여겨진다. 4차 산업에 속한다. 하지만 기계공학은 2차 산업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여기서 2차나 4차 같은 숫자 때문에 대중들은 '수준이 높고 낮고'를 잠재적으로 판단해 버린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컴퓨터공학과 기계공학이 어느 한쪽만 비약적으로 발전해 버리면 마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처럼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슈트 없는 자비스나, 자비스 없는 슈트처럼 말이다.
감정은 무엇일까? 인간은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갖고 있는 능력에 대해선 굳이 고찰해보지 않는 동물일지 모른다. 가령 우리가 항상 숨을 쉬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숨을 쉴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고, 항상 눈을 깜빡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눈을 깜빡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이 무엇인지, 왜 존재하는지를 고뇌하지 않는다. 감정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취향이나 기호와 전혀 상관없이 인간에게 존재한다.
감정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끼는 기분"이다. [인간 외부에서 일어난 일]이 [인간 내면으로 들어오면서 생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용]이 감정이다. 내면에서의 작용은 내면을 담고 있는 본체(인간)의 성향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기도, 숨겨지기도 한다. 이를 우리는 감정표현이라고 한다.
'감정 그 자체'와 '표현된 감정'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표현된 감정'을 보고 '감정 그 자체'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과장된 감정 표현을 하고, 누군가는 감정을 숨기는 성향이다. '표현된 감정'으로 '감정 그 자체'를 판단하는 일은 섣부르다.
<월-E>를 보며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주인공 월-E와 이브에게 동화된다. 일단 확실한 건 그들이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월-E는 눈으로 웬만한 인간의 모든 감정을 표현한다. 눈물만 흘리지 않을 뿐 기쁨, 슬픔, 희망, 우울, 설렘, 아쉬움, 공포 등등을 몇 안 되는 기계음과 함께 적절하게 표현한다.
그런데 월-E가 영화 후반부에 리셋되는 상황이 생긴다. 이브는 지구로 도착한 후 월-E를 급히 그의 집으로 데려가 수리하지만, 월-E는 도무지 그 전의 귀여운 월-E가 아니다. 재부팅된 월-E는 이브를 알아보지도 못한 채, 밖으로 나가 쓰레기 처리를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월-E는 그 전의 다양한 감정표현과 다르게 눈이 일자로 고정되어 있다. 지극히 기계적인 월-E의 행동을 통해, '공장초기화' 시점의 월-E에게는 감정이 없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영화에 없는 부분은 우리의 상상력으로 메꿔보자. 700년 동안 황폐화된 지구, 그 세월 동안 청소로봇 월-E들은 고장 나고 정지한다. 남아있는 주인공 월-E만 본래의 목적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 700년 동안 지구는 한 번에 황폐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서서히 쓰레기화되었으리라. 월-E는 인간의 문명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시점부터 생존했을 테고, 다른 월-E들과는 다르게 인간의 '감정 표현'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기계 스스로의 학습활동, 딥러닝이 오늘도 또 등장한다.
그렇다면 원론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기계는 과연 감정을 배울 수 있을까? 감정은 생명체만의 것일까?
인간은 감정을 타고난다. 다른 많은 생명체들도 마찬가지다. 태어나서 '감정 표현'을 학습하지 않는다. 1차원적인 감정들, 이를테면 '배고프다', '아프다', '졸리다' 등등의 감정은 지능이 발달하면서 복합적으로 확장한다.
감정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죽음'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생명체들만이 가질 수 있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은 온갖 경쟁과 역경을 이겨내고 어렵사리 세상에 얼굴을 내민다. 세상에 얼굴을 내민 후에도 생존을 위한 사투는 계속된다. 감정은 '감정 표현'을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가 켜켜이 쌓여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더 성장하면서 사회적인 소통과 교류를 통해 다른 감정들을 갖게 되고, 또 더 복잡한 감정들을 자연스레 습득하게 되는 게 아닐까.
이렇게 가정하면 '표현된 감정'을 따라 하면서 '진짜 감정'을 배우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월-E> 같은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에 너무 극사실주의적인 얘기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몇 가지 가정은 충분히 해볼 수 있다. 월-E가 다른 월-E들과 다른 이유는 700여 년 동안 혼자서만 '생존'했다는 점. 어쩌면 그는 자연스레 그의 목적인 '쓰레기 처리'를 위해 작동 연한을 스스로 연장해야 함을 깨달았을 수 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을 거라 가정해볼 수 있다. '생존'이라는 말이 월-E 같은 기계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월-E가 보여주는 감정은 이처럼 꼭 '보고 배워서' 생긴 것이 아니라 '살아남다 보니' 자연스레 습득하게 됐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마치 인간처럼 말이다.
가볍게 볼 수 있는 픽사 애니메이션이지만, <월-E>는 꽤 무서운 메시지를 던진다.
일단 첫째는 세뇌. 마치 설국열차가 떠오르게 한다. 우주선에 탑승하고 있는 인간들은 홀로그램으로 보여주는 것들을 전부라고 믿는다.
둘째는 신체능력의 퇴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리함과 효율을 추구한다. 700여 년 동안의 우주선 생활은 편리와 효율을 극단적으로 지향하게 만들었다. 공중에 떠있는 의자에만 앉아있어도 모든 생활이 가능해지고, 생존을 위한 식음료는 로봇이 모두 가져다준다. 그렇게 700년이다. 다리는 쓸 일이 없어지고 근육은 불필요한 기관이 되어버리는 모습이 묘사된다. 선장실에는 역대 선장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씬은 다분히 의도한 듯, 점점 살이 뒤룩뒤룩 쪄가는 선장들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인간들은 왜 자꾸 인공지능을 더 정교하고 우월하게 만드려 노력할까? 편리함 때문이다. 인공지능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순수한 학문의 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결국 최종적인 지향점은 인간의 삶이 기존보다 나아지길 바라는 열망 때문이다. 기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새로운 무언가를 더 배우고 성장한다. 하지만 완성된 기술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과정은 금세 잊힌다. 그리고 퇴화한다.
저학년의 수학 교과서를 보면 공식으로 간단히 풀 수 있는 문제도 여러 추리 과정을 통해 풀도록 유도한다. 복잡한 공식은 중고등교육 단계에서 등장한다. 수학은 '암기'가 아니라 추론 과정을 통해 근육 키우듯 능력을 향상시키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고등교육과정의 공식을 배우면 고등교육과정의 문제를 남들보다 일찍 풀 수 있다. 그렇지만 절대 그 이상으로 두뇌 능력을 키울 수 없다. 과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정을 확장해 나간 피교육생은 공식 없이도 더 복잡한 문제까지 스스로 과정을 창조하여 풀 수 있다.
기술과 인류의 관계는 한 개인이 수학을 배우는 것과 같다. 완성된 기술만을 사용하면 편하다. 하지만 기술을 성장시키는 과정이 없다면 거기서 멈춘다. 그래서 인류는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 편함을 추구하기 위한 고뇌의 중요성을 <월-E>의 인간들이 보여준다. 만약 등장하는 인간들이 700여 년의 시간 동안 '비록 앉아서 생활하면 편하더라도-'이라는 단서를 두고 운동하며 근력을 유지했다면 그들의 신체는 퇴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발전되어 있는 로봇이지만,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해 자주적으로 연구하고 경계했다면, 메인 컴퓨터에게 홀로그램으로 차단되어 살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기술은 달콤하다. 하지만 달콤한 맛을 보기 위해 겪는 절차의 쓴 맛은 그 달콤함 만큼이나 필수적이다.
<월-E>가 보여주는 미래에 대한 통찰은 보통 수준이 아니다. 두 예쁜 기계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데 많은 장면을 할애하지만, 결코 과하지 않다. 인간이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모습도 유치하거나 진부하지 않다.
어린이 영화가 이 정도 수준으로 인공지능과 기계에 대해 보여주고, 억지스럽지 않게 미래를 그려준다. 아마 이걸 어릴 때 본 관람객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어서도 뇌리에 이 영화로 생긴 통찰을 간직한 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화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류의 상상력을 끌어올리고, 새로운 상상을 촉진시켜 세상을 발전시키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