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내가 애정하는 시 20

by 유작가

겨울 들판을 거닐며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 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허형만 시인의 <겨울 들판을 거닐며>는 2017년 광화문글판 겨울 편에 선정된 시로, 그 해 겨울 광화문 교보문고 건물 벽에 오랫동안 매달려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나도 그때 이 시를 처음 알게 됐고,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됐던 것 같다. 내가 가진 작은 것들로, 작은 경험으로, 작은 시야로 다른 사람을 짐작해서 생각하고 측정하고 판단하고 함부로 말하며 살지 않았나.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찔림과 울림이 동시에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겨울 들판에도... 봄이면 자라날 새싹과, 싱싱한 들풀과, 우리의 아픔이 숨어있는 것이다. 단지 지금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사람이든 들판이든 가까이 다가서면 그 안에는 무한한 잠재력과 에너지가 있다.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시인의 말처럼, 나도 인생을 살면서 이런 마음으로 모든 것을 대하고 싶다.



코끝이 찡할 정도로 추운 겨울에 오래도록 걷는 것을 좋아한다. 겨울바람, 겨울 냄새, 겨울 느낌이 그립다. 기회가 되면 꼭 겨울 들판을 걸어보고 싶다.

살다 보면 정말 매운바람을 오랫동안 맞고 걸어가야 할 때가 있다. 그때는 얼굴이 아리고, 칼로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칼바람이 아프지만, 그게 지나고 나면 또 아무렇지 않아 지고 산들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봄이 온다.

삶은 나에게 매섭게 대하지만은 않았다. 따사로운 햇살이 함께 하기도 했고, 시원한 바람이 땀을 한 번에 식혀주고 가기도 했고, 낙엽이 살포시 내 어깨 위에 앉았다 가기도 했다.

겨울 들판을 혼자 걷는 사람이 보이면, 가까이 다가가서 함께 걷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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