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서 사람들과 목표에 대해 얘기나누던 중이었다. 34살 남자 L은 올해 목표가 연애, 결혼이라고 말했다. 이 나이쯤 되고 보니 결혼 생각을 안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다. 점점 나이는 드는데 결혼을 하자니 잘 살 자신이 없고 안 하자니 주변에서 결혼이 의무인 것마냥 말하는 게 불편하다고 했다. 직업이 공무원이라고 밝힌 L은 직장 이야기를 꺼냈다.
"직장에서 사람들이 왜 결혼 안 하냐고 묻더라고요. 공무원 조직이 좀 그렇잖아요. 되게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고."
그냥 넘어가면 될 것을 평소 반골기질이 다분한 나는 L에게 이렇게 물었다.
"혹시 공무원 되기 전에 어떤 일 해봤어요?"
아무 일도 안 해봤단다. 대학교 졸업 후 바로 공무원이 됐단다. 역시나 싶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말했다.
"공무원 말고 다른 사회 생활을 안 해봐서 그렇게 느낄 수 있는데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건 공무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기업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말한다. 공무원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이라고 말이다.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현재 나는 7년차 군무원이다. 어떤 조직보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군부대에서 근무하면서도 나는 우리 조직이 보수적이거나 폐쇄적이라고 느낀 적이 별로 없다. 군무원이 되기 전에 생산, 영업, 판매, 납품부터 공사장 막노동까지 다양한 곳에서 일을 해봄으로써 어느 조직이든 다 비슷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이곳이 다른 사기업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라고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자유로운 연차 사용
20대 때 LG세탁기 디스플레이 조립체를 조립 및 검사하는 LG 하청 업체 P에서 일할 때는 연차를 거의 못썼다. 어쩌다 하루 쉬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 연차를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한 거짓말을 해서 겨우 일을 뺀 다음 밀린 볼일을 보곤 했다. 그렇게 쉬다가 다음날 출근하면 계장의 태도가 확 달라져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아파도 쉴 수 없었다. 몸이 안 좋아서 하루 쉬겠다고 하면 계장이 난리를 쳤다. 사생활 존중 따윈 없었다. 회사에 올인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P공업과는 다르게 지금 근무하는 곳에서는 눈치 보지 않고 연차를 쓸 수 있다. 임용 후 가장 놀랐던 것도 자유로운 연차 사용이었다. 1년에 주어지는 21일의 연차를 원할 때 아무 때나 쓸 수 있다. 우리 부대는 해당 월에 쓸 연차를 전 월에 종합을 하는데 연차 종합 메모가 올 때마다 이렇게 대놓고 연차 쓰라고 하는 곳도 다 있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미리 신청한 연차 외에도 몸이 아프거나 급한 볼일이 있을 때도 상사에게 보고를 하면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연차를 허락해준다. 내가 매년 12월만 되면 월요일마다 휴가를 다 써서 주 4일제를 할 수 있는 것도 연차 사용이 자유로운 덕분이다.
휴식 여건 보장
윤활유 납품 및 영업을 하는 B회사에 다닐 때는 퇴근 후 집에 도착했는데도 부장 전화를 받고 다시 회사로 가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퇴근을 하고도 혹시 연락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었고 헬스장에서 운동할 때도 폰을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B회사와 달리 현재 직장에서는 휴식 여건이 철저히 보장된다. 퇴근 이후에는 업무적으로 연락하지 않고 휴일에는 더더욱 불필요한 연락을 삼간다. 휴일이나 또는 연차 쓴 날에 급한 경우 업무적인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때도 항상 "쉬는 날 연락드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빼먹지 않는다. 배려 받는 기분이 든다.
P공업에서 근무할 당시 일이 많을 때는 밤 11시까지 일했고 토, 일요일에도 쉬지 못하고 출근했는데 지금은 야근이나 휴일근무 지시가 전혀 없다. 오히려 제 시간에 업무를 마치고 퇴근할 것을 권장한다.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행
10년 가까이 영업직을 맡고 있는 지인이 있다. 지인이 말하길 자신의 회사에는 일을 실수하거나 하면 상사가 막말을 일삼는다고 했다. 심한 경우 쌍욕을 날릴 때도 있다고 한다. 그 얘길 듣고 깜짝 놀란 나는 "아니, 요즘에도 그런 회사가 있다고? 진짜?"라고 되물었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이 맞단다.
나는 쌍욕까진 아니지만 20대 때 다닌 직장 중에는 쉽게 짜증을 내거나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상사를 몇 명 만난 적 있었다.
지금 근무하는 곳은 다르다. 모두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행을 한다. 부대 자체적으로 교육을 많이 한다. 상하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바른 언행 사용을 장려하고주기적인 성인지 교육을 통해 성군기를 바로 잡는 데도 앞장선다. 다들 말을 조심해서 하는 분위기라 폭력적인 언행은 보기 힘들다.
사기업이라고 다를까?
공무원이 폐쇄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공무원의 수직적 구조가 답답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기업은 다를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안 해도 되는 구조인가? 아니다. 사기업도 다르지 않다. 어느 조직이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건 다 마찬가지다. 내 생각을 말하고 내 의견이 받아지길 바라는 건 경력과 경험이 쌓이고 능력이나 기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왔을 때 가능한 일이다. 아직 경험이 전무한 사회초년생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반론만 제기한다면,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불평만 한다면 그건 그 조직이 폐쇄적인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견문이 좁은 탓이다.
공무원 조직 내부에서 사건,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를 알리지 않고 덮으려고 하는 것을 예로 들며 공무원의 보수성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밝히지 않고 쉬쉬하는 것, 물론 잘못 됐다. 그렇다면 사기업은 다를까? 사기업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다 밝히고 인정하고 사과할까? 그렇지 않다. 사기업도 똑같다. 사건, 사고를 덮으려고 하는 건 공무원이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라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다. 자기 잘못을 바깥에 알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직을 떠나 사람의 본성이 그렇다. 잘한 건 알리고 싶고 잘못한 건 덮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공무원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고 평가받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프레임을 씌우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공무원이 잘못을 저지르면 "으이구~ 공무원이니까 저렇지." 하고 말한다. 하지만 사기업 다닌 사람이 잘못을 했을 때 "사기업인이니까 저렇지."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군인이 너무 FM대로 일을 하면 "군인이니까 저렇지."라고 말하지만 사기업 직원이 곧이곧대로 일한다고 해서 "사기업 다니니까 저렇지."라고 말하진 않는다.
나 역시 때때로 프레임을 씌워 사람과 조직을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부대에서는 군무원, 장교, 부사관 등 여러 신분의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FM대로 일하는 현역 군인을 보면 나도 모르게 '군인이니까 저런가 보다.'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군무원에게는 그런 생각을 안 한다. 군인이니까 저래, 공무원이니까 저런 거야 하고 자기 멋대로 프레임을 씌울 때 그 조직은 보수적, 폐쇄적인 조직으로 낙인찍히는 법이다.
다른 부대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지인이 말하길, 체육대회 때 한 여군무원이 레깅스를 입고 왔는데 상사가 지적을 하더란다. 그걸 본 지인이 "참나, 군부대가 이렇게 보수적이다."라고 말했는데 그건 지적을 한 그 상사의 생각이지 군부대 전체의 생각이 아니다. 얼마 전 우리 부대에서 열린 체육대회에서도 레깅스를 입고 온 여군무원이 몇 있었지만 아무도 뭐라고 한 사람이 없었다.(물론 힙은 가렸지만) 그걸 본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밖에서 레깅스 입고 다니는 여자 보고 뭐라 하는 어른들도 많은데 군부대에서는 아무 말도 안 하네? 와 요즘 군대 진짜 진보적이다." 과연 군대는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 결국 보는 사람의 시선에 달려 있는 것 아닐까?
공무원 문화가 경직돼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구체적인 상황이나 경우도 없이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경직된 문화가 뭔지 나는 모르겠다. 조직도 조직이지만 결국엔 그 조직을 구성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닐까. 군인은 딱딱하고 고리타분할 거란 인식이 있지만 우리 부대에는 밝고 장난끼 많은 군인도 많고 지위가 높은 데도 아랫사람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군인, 군무원도 많다.
책 <프레임>의 출판사 서평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다.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세상을 향한 마인드셋, 세상에 대한 은유,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등이 모두 프레임의 범주에 포함되는 말이다. 마음을 비춰보는 창으로서의 프레임은 특정한 방향으로 세상을 보도록 이끄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보는 세상을 제한하는 검열관의 역할도 한다.
사람이나 집단에 그릇된 프레임을 씌우게 되면 잘못된 편견이나 선입견에 휩싸이기 쉽다.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상대방을 이해하기 어렵고 소통도 힘들다. 이 사람은 이럴 거야, 저 집단은 저럴 거야 하고 어떤 프레임을 씌우며 판단할 때 그 사람과 집단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된다. 내 마음대로 쉽게 단정지을 때 더 많은 걸 배우거나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착각, 오류, 오해 등은 우리의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편견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내 안에 있는 틀을 깨고 보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상대방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기 이전에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내 인식부터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