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타치는 권작가 Apr 04. 2024

상사에게 말했다 "일이 적성에 안 맞는 거 같아요"

"지금 하는 일이 제 적성에 안 맞는 거 같아요."


출장길에 내가 직장 상사 K에게 한 말이다. 그것도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속상관에게. 업무에 대해 얘기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어서 그렇게 내뱉었다. 상사에게 대드는 것도 아니고 싸우자는 것도 아니었다. 평소 상사 K와 나는 친하다. 나이가 14살 차이나는 것치곤 서로 장난도 잘치고 할 말도 편하게 하며 스스럼없이 지낸다. 그래서 이 일이 적성에 안 맞다는 내 생각을 편하게 얘기한 것이다. 그렇게 털어놓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요 근래 기분이 안 좋았다. 사무실 내 또 다른 상사 Y의 짜증 때문이었다. 직장에서의 나는 업무능력은 부족한 편이다. 같이 일하는 다른 선후배도 다 그렇게 생각한다. 대놓고 내게 말하기도 한다. 이건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니까. 상사가 지시한 걸 깜빡하고 안 해서 혼나고, 하노라고 했는데 처리 결과가 상사가 생각한 것과 달라서 혼난다. 혼나도 할말은 없다. 내가 똑바로 못해서 듣는 꾸중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가끔은 '이럴 거면 차라리 니가 하지 그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웬만하면 혼나도 인정하고 웃으며 잘 넘기는데 한 번씩은 마음이 상할 때가 있다. 상사 Y가 짜증을 낼 때다. 내가 일을 깜빡하고 빠뜨리거나 실수했을 때 상사 Y가 짜증을 많이 낸다. 잘못했으니까 짜증낼 수도 있지만 별것도 아닌 일에 너무 짜증내니 나도 기분이 안 좋다.


여기까진 괜찮다. 기분을 더 상하게 만드는 건 Y의 말투와 표정이다. 내가 실수하면 "허, 참나~" 하고 콧방귀를 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가끔은 그 표정이 나를 '뭐 저런 게 다 있나'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시 당하는 기분이 들어 기분이 팍 상한다. 매번 그런 표정인 건 아니지만 짜증은 자주 낸다. 말투 자체가 짜증스러운 말투다. 저 사람 아내 되는 분은 참 피곤하겠다 싶을 정도다.


내 잘못에서 비롯된 결과지만 혼나는 날이 잦아지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되받아버리고 싶은 분노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꾹 참았다. 아무리 기분 나쁘고 서운한 게 있어도 왜 그런 식으로 얘기 하냐며 신경질적으로 말해선 안 된다. 마음을 차분하게 한 다음, 이런 저런 부분이 서운했다고 내 마음을 담담하게 이야기 해야 한다. 그래야 싸움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잘 풀 수 있는지는 알지만 상사 Y와 얘기해서 풀 마음은 없었다. 친한 관계면 얘기해서 풀겠는데 어중간한 사이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내는 게 당장은 더 편했다.


상사한테 자주 혼나고, 혼날 때마다 마음은 상하고, 가끔은 나조차도 내가 왜 그런 식으로 일처리를 한 건지 이해가 안 돼서 답답하고, 그래서 출장길에 상사 K에게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하소연 한 것이다. 그러곤 이렇게 나름의 해명도 했다.


"이 부서에 와서 처음 정비 배울 때는 일에 관심이 없었어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배워도 금방 까먹기 일쑤였죠. 처음엔 다들 이해해 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선후배들 반응이 달라지더라고요. 같이 일하는 동생한테 은근히 핀잔 받고 상사한테는 아직 이것도 모르냐며 대놓고 면박도 당했고요. 이만큼 연차가 쌓였는데도 아직 일을 똑부러지게 못하는 제가 창피하게 느껴졌어요. 뒤늦게 책 보면서 공부했지만 원래부터 관심이 없는 분야라 그런지 말은 알겠는데 머리속에 그려지도록 이해가 되지는 않더라고요. 한 가지 핑계를 대자면 이런 부분도 있어요. 같은 고장사례를 자주 접해야 반복숙달 해서 기억에 남는데 우리 일 보세요. 같은 고장사례가 자주 있지도 않잖아요. 장비에 따라 어떤 건 3개월에 한 번, 어떤 건 정비해봤던 고장 사례를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것도 있어요. 이러니 제가 어떻게 기억이 나겠어요. 사람들한테 궁금한 거 물어보려고 해도 아직 이것도 모르는 게 말이 되냐는 소리 들을까 봐 물어보지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몰라도 아는 척 대충 넘어갔고 여기까지 온 거에요."


상사는 내 얘기를 담담하게 들어줬다. 반박하지도 다그치지도 않았다. 모든 걸 다 이해해주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듯한 정도의 느낌은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니 이제 저한테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이때까지 가르쳤는데도 안 되면 그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냥 '아, 쟤는 저것밖에 안 되는 애구나.' 하고 기대를 내려놓으시란 말이에요!ㅋ 그럼 서로가 편할 거 아니에요?!ㅋ"


장난치듯 하는 내 말에 상사가 껄껄껄 하고 웃었다.



직업 선택 시 적성이 중요할까?

나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성은 그저 참고사항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성 따져 가며 일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일은 밥벌이다. 먹고살기 위해 한다. 직업이 자아실현의 수단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우선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하면서 돈 많이 버는 사람도 있다. 있긴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다. 대한민국 1%다. 나머지는 그냥 한다. 일이 좋고 싫고를 따지지 않고 그냥 일한다.

   

적성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적성도 따져야 한다. 다만 적성이란 게 나하고 딱 맞는 일을 하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진짜 싫은 일부터 골라낸 다음 남은 일 중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일을 하면 그게 내 적성에 맞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적성의 고려도는 그 정도다.


적성말고도 돈, 사람, 업무강도, 복지, 거리 등등 일을 선택하는 여러 요소가 있다. 사람들은 일이 적성에 안 맞더라도 여러 요소 중 한 가지라도 충족이 되면 일을 다닌다. 일이 적성에 안 맞지만 돈을 많이 줘서 다닐 수도 있고 사람이 좋아서 다닐 수도 있다. 직장이 집이랑 가까워서 다닐 수도 있다. 일을 그만두고 싶어도 어느 하나 만족스러운 게 있으면 어떻게든 직장을 다닌다. 그러니 적성은 직업 선택에 있어 고려해야 할 여러 요소 중 겨우 하나일 뿐이다.


나는 군무원이다. 군부대에서 정비 업무를 하고 있다. 일이 내 적성과는 안 맞다. 군대도 안 간 내가 군대가 뭐가 적성에 맞다고 들어왔겠는가. 처음 와본 군대지만 생각보다 직업 만족도는 높다. 공직자라는 명예 때문이다. 공무원이면 어딜가도 평타는 친다. 지금은 공무원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공무원이라고 하면 직업이 괜찮다는 정도의 얘기는 듣는다. 공직에 몸담고 있다는 그 명예로움 때문에 만족하며 일해왔다.


내가 해본 일 중 적성에 잘 맞는 일은 두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박스 접기다. 나는 박스를 잘 접는다. 그냥 잘 접는 게 아니라 빠르고 정확하게 잘 접는다. 평소 손이 빠르다. 20대 때 소형가전 생산공장에서 박스 접기 알바할 때 어른들로부터 박스 진짜 빨리 접는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일이 적성에 잘 맞았다.


지금 하는 일도 손으로 만지고 고치고 하는 일이지만 기계에 대한 이해력이 있어야 하고 창의성도 조금 필요하다. 내 적성과는 안 맞다. 내겐 단순노동이 잘 맞다. 그렇다고 박스만 접으며 평생 살 순 없다.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 해도 박스만 접고 살기엔 내 젊음과 가능성이 아깝다.


현재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그만 둘 생각은 없다. 매일 칼퇴근 할 수 있고 퇴근 후 혼자만의 시간이 많다는 장점이 있다. 공휴일도 다 쉬어서 좋다. 적성도 안 맞고 월급도 얼마 안 되지만 다른 좋은 것들이 있으니 버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직장인들, 오늘도 파이팅이다!


이전 05화 직장 동생 때문에 열받은, 아니 빡친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