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정문일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르헤시아 Jan 04. 2024

식견(識見)

문장(文)은 마음에 품고 있는 실재(實)가 밖으로 드러나 꽃핀 것이다. 실재(實)는 마음 가운데 쌓여 있는 것이다. 마음에 쌓여 있는 것이 이미 깊고 두텁게 되면 문장(文)으로 밖에 드러나 환하게 빛난다. 가슴속은 텅 비어 든 것이 없는데 한갓 겉만 꾸며서 이를 취한다. 번드르르하게 바르는 것을 문사(글짓기)로 생각하고 이를 아로새겨 꾸미는 것을 글(文)이라고 여긴다. 스스로는 천하의 공교로움을 다하였다고 여겨도 아무 쓸데없는 헛소리요,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을 바르게 분별하는 능력을 일러 '식견'(識見, 배워서 익히고 쌓은 지식과 견문)이라 한다. 식견이 높은 자는, 그가 쓴 문장(文章) 또한 높다. 식견(識)이 낮은 자는, 그가 지은 문장 또한 낮다. 글(文)의 좋고 나쁨은 문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식견(識)에서 비롯된다. 나무로 비유하자면 식견(識)은 뿌리고, 문장(文)은 가지와 잎이다. 뿌리가 튼튼한데 가지와 잎이 무성하지 않은 나무는 없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은데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 또한 없다. 그러므로 식견(識)이 자라기를 구하지 않고 문장에서 공교로움만을 구하고 오로지 글 잘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한갓 망령 된 짓일 뿐이다.


-이하곤(李夏坤 1677-1724), 『두타초(頭陀草)』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성찰(自己省察)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