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트라비아타 / Di provenza il mar il suol>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가장 낮은 눈높이에서 오페라에 관한 글을 쓰게 된다면 그 첫 작품은 고민 없이 <라 트라비아타>가 될 거라고 생각해왔어요. 가장 화려한 시작으로 눈과 귀를 사로잡는 작품이기 때문이지요. 라 트라비아타는 알렉상드르 뒤마 2세의 소설 <동백 아가씨>를 토대로 했습니다. 뒤마의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실제 모델이 있었는데, 한때 뒤마의 연인이자 사교계의 코르티잔이었던 마뤼 뒤플레시가 그 주인공이었다. 뒤마는 열렬히 사귀던 마리와 헤어진 2년 후, 스물셋의 마뤼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생각하며 <동백 아가씨>, 바로 이 작품을 썼다고 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라 트라비아타>를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동백 아가씨>라는 동명의 우리 영화가 있을 뿐 아니라 영화의 주제곡이 바로 전 국민이 사랑하는 이미자 선생님의 노래이기 때문일 터.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여기까지만 들어도 눈물샘이 자동반사적으로 찌릿찌릿해집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유럽 오페라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베르디의 오페라 제목 대신 원작 소설의 제목을 딴 <춘희(春姬:동백 아가씨)라는 제목으로 1948년 명동에 있는 시공관에서 공연되었는데 1948년이면 광복 후 나라가 안정되기도 전에 유럽의 오페라가 명동 한복판에서 펼쳐졌다니 그 또한 놀랍지 않나요?
많은 사람이 <라 트라비아타>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화려한 ‘Brindisi(축배의 노래)’를 꼽습니다. 흥청망청한 파티 장면으로 오페라의 첫 장면을 더욱 화려하게 만드는 이 아리아는 여러 성악가들의 단골 레퍼토리며 이 작품이나 노래 제목을 전혀 모르는 이들도 첫 소절만 들으면 바로 ‘아하!’싶을 만큼 익숙한 선율이지요.
[내 생애 첫 오페라]에서 꼽은 <라 트리비아타>의 베스트 아리아는 남자 주인공 알프레도의 아버지인 제르몽이 부르는 ‘Di provenza il mar il suol(프로벤자 내 고향)’이랍니다. 코르티잔과 살림을 차린 아들을 회유하기 위해 찾아가 부르는 아리아로 프로방스(provenza)의 아름다운 바다와 육지를 찬양하는 내용이죠.
프로방스의 바다와 육지를
누가 네 마음에서 지워버렸느냐
누가 네 마음에서 지워버렸느냐
프로방스의 바다와 육지를
고향의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太陽)을
어떤 운명이 빼앗았느냐
어떤 운명이 빼앗았느냐
고향의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고음의 비올레타(소프라노)와 테너 알프레도(테너)의 아리아들 속에 제르몽(바리톤)의 목소리는 묵직한 울림으로 전환점이 되는데 아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 아들의 연인을 만나 헤어져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나, 아름다운 고향의 자연을 노래하며 아들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회유하는 품격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우리의 아침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김치 싸대기와는 차원이 다른. 이 아리아를 들으며 시인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우리 가곡 <향수>가 떠올랐습니다. 물론 <향수>에는 누군가의 사랑을 반대하며 회유하는 사연이 있진 않지만 아름다운 고향의 풍경을 그림처럼 노래하고 있어서겠지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1927년에 발표된 시에 1939년 작곡가 채동선이 곡을 붙였고, 1989년 작곡가 김희갑이 다시 붙인 곡을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듀엣으로 불러 알려진 이 노래는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만남이라는 의미로도 화제가 되었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운 고향에서 보낸 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시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냈죠.
어쩌다 보니 저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대여섯 번은 본 듯합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공연장에 따라, 연출자에 따라, 배역을 맡은 가수에 따라 모두 다르게 기억되는 걸 보면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는 것 또한 공연을 즐기는 재미임이 틀림없어요. 유독 이 작품을 좋아하여 원작 소설을 찾아 읽기도 하였는데 책으로 읽는 오페라는 공연장에서 느끼지 못한 디테일을 챙길 수 있는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그중 소설 속의 여주인공 ‘마르그리트’를 기억하는 장면으로 이런 글이 있어 옮겨봅니다.
마르그리트는 연극이 첫날 공연을 빠뜨리지 않고
반드시 관람하러 갔다.
그러고는 밤마다 극장 아니면 무도회장에서
세월을 보내곤 했다.
신작이 상연될 때마다
어김없이 그녀의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
어떨 때에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아래층의 높직한 특석에는
세 가지 물건이 가지런히 놓이게 마련이었다.
오페라글라스와 봉봉 봉지와 동백꽃 다발.
동백꽃은 한 달의 스무닷새 동안은 흰 빛깔이고,
나머지 닷새 동안은 분홍 빛깔이었다.
어떤 까닭으로 이렇게 빛깔을 바꾸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도 이렇게 쓸 뿐이지, 그 이유는 전혀 모른다.
동백꽃의 사연에 관해서는
그녀가 가장 열심히 다닌 극장의 단골손님과
그녀의 애인들도 나처럼 알아차리고 있었다.
어느 누구 하나도, 마르그리트가
동백꽃이 아닌 꽃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일은 없었다.
그러더니 그녀의 단골인 ‘바르종’ 꽃가게의 여주인이
‘마담 커멀리어’라는 별명을 붙이게 되어,
그것이 그대로 세상의 통칭이 되고 만 것이었다.
-춘희(뒤마 피스/일신 서적 출판사)
마침 이 책을 읽을 즈음에 공효진, 강하늘 주연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인기리에 유행하고 있던 터라 ‘혹시 드라마 작가도 나처럼 트라비아타 마니아?’하는 엉뚱한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답니다. 어쨌든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첫 오페라로 선택하기에 여러 모로 손색이 없는, 틀림없는 명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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