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아치 / vesti la giubba>
‘내가 이 훌륭한 사람들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게 너무나도 자랑스럽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방탄소년단이 그랬고, 피겨의 여왕 김연아가 그랬고,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씨가 그랬어요.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인들의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이.
소프라노 조수미 씨는 프랑스 파리에서 데뷔 20주년을 준비하고 있었던 날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서둘러 귀국 준비를 하려 했죠.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관객들과의 약속을 지키라고, 아버지는 네가 공연을 취소하고 오는 걸 원치 않으셨을 거라고 설득했대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아버지의 장례식이 엄수되던 때에 조수미 씨는 파리에서 독창회를 열고 있었죠. 관객들이 전혀 눈치를 챌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노래를 부르던 조수미 씨는 눈물을 참으며 어렵게 말을 꺼냅니다. “저희 아버지를 위해 기도드리고 싶은데요. 오늘 아버지가 제 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는 하늘에서 저와 여러분이 함께 있음을 굉장히 기뻐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오늘 밤 저와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콘서트를 아버지께 헌정하고 싶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들려드리고 싶어요.”라고.
개인적인 슬픔이나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무대 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연기해야 하는 가수나 배우라는 직업은 참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무대 위에서는 그저 작품의 배역으로만 살아내야 하는 슬픈 광대들.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팔리아치>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베리즈모 오페라 중의 하나입니다. ‘팔리아치’란 이탈리아어 ‘팔리아쵸’의 복수 형태로 유랑극단의 광대들을 말하죠. 작곡가인 레온 카발로가 곡을 쓴 것뿐만 아니라 대본 작업도 직접 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겠고 또 한 가지, 구성 면에서도 뚜렷한 특징을 보이는데요. 흔히 극중극 또는 액자식 구성을 띄고 있어요.. 그래서 등장인물을 파악할 때 현실에서의 이름과 극 중 배역 이름을 연결 지어 기억해두면 좋아요. 남자 주인공 카니오(극 중 팔리아치)는 유랑극단의 단장이고, 그의 아내 네다(극 중 콜룸비네), 유랑극단의 단원 토니오(극 중 타테오) 그리고 나이 어린 단원 베페(극 중 하를레킨)와 마을 청년 실비오가 등장합니다. 이 오페라에는 프롤로그가 있어요. 한 마을에서 유랑극단의 막이 오르기 전 꼽추 광대 토니오가 등장해 노래를 부르는데 실제로 공연의 집중도를 높여주죠. 주인공인 토니오 역은 바리톤이 맡아 묵직한 인사말에 무게감이 실립니다.
Si Puo? (안녕하시오?)
배우의 눈물은 거짓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극본을 쓰는 작가는
관객 여러분에게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드리려고
지난날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일들을
무대 위에 옮겨놓는답니다.
광대들도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이며,
여러분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걸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연극이 시작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유랑 극단의 공연을 기대하며 들떠있는 가운데 단원들이 등장하고 단장인 카니오는 공연 시작 전에 한 잔 하자며 주막으로 가지만 젊은 아내 낫다는 따라가지 않고, 꼽추 토니오는 그녀의 곁에 남았어요. 넷다는 남편인 카니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꿈을 꾸죠. 이때 넷다에게 토니오가 다가가 열렬한 고백을 하고 그녀를 힘으로 굴복시키키려 하자 넷다는 채찍으로 그를 쫓아버립니다. 모욕감을 느낀 토니오는 넷다에게 복수를 결심해요.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 남자가 또 한 명 있었으니, 바로 마을의 청년 실비오입니다. 그가 찾아와 함께 도망치자고 하자 실비오에게 마음이 간 넷다는 오늘 밤 공연이 끝나고 나면 함께 도망치자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 둘의 달콤한 사랑을 꼽추 광대 토니오가 지켜보고 있었어요. 복수심이 불탄 토니오는 단장 카니오를 데려와 아내의 밀회 현장을 보여주자 화가 난 채로 공연을 시작하게 됩니다. 분노와 절망에 휩싸인 카니오는 연극을 위해 스스로 분장을 하며 처절하게 ‘vesti la giubba(의상을 입어라)’를 부르는데, 1막의 마지막 곡이며 오페라 <팔리아치>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Non so pi quel che dico
E quel che faccio
Eppur d'uopo, sforzati! Bah!
sei tu forse un uom
Tu se' Pagliaccio
Vesti la giubba
E la faccia in farina
La gente paga, e rider vuole qua
E se Arlecchin t'invola Colombina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공연은 해야지
네가 사람이더냐, 넌 광대다
이제 공연이 시작된다
의상을 입어라
그리고 얼굴에 분칠을 해라
관객은 돈을 내고 왔으니 웃고 싶어 한다
웃어라 광대여, 슬픔과 고통을 감추고
이제부터는 2막이 시작되고, ‘극 중 극’의 형태로 공연 속에서도 연극 무대가 펼쳐집니다. 1막에서는 현실의 인물이, 2막에서는 극 속의 배우가 되는 거죠. 극 중 극은 ‘집에 온 남편’이라는 제목의 연극인데요,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남편이 외출한 사이 혼자 있던 아내에게 하인이 고백을 하지만 무안하게 거절당하고, 아내는 젊은 광대를 집에 불러 사랑을 나누다가 하인의 고자질로 남편에게 들키게 됩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이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한 거냐고’ 추궁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하인 핑계를 대죠. 똑같죠? 1막의 현실 속 이야기와 복붙(Ctrl+C, Ctrl+V) 한 것처럼 똑같아요. 1막에서 연극을 시작하기 전 아내의 밀회를 목격했던 남편 카니오는 극 중에서 현실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현실과 극을 혼동하며 격한 분노를 합니다. 속사정도 모르는 관객들은 그저 연기를 잘한다고만 생각하고 환호를 보내죠. 넷다는 남편을 상태를 눈치채고는 이성을 찾게 하려고 애쓰지만 카니오가 점점 격해지며 ‘바람을 피운 상대를 대라’고 다그치자 참을성을 잃은 넷다는 ‘죽어도 말 못 한다’고 대들죠. 분을 못 이긴 카니오는 넷 다를 칼로 찔러 죽입니다. 여기서 카니오에게 슬쩍 진짜 칼을 건넨 인물이 바로, 꼽추 광대 토니오이고요. 황당하게도 극 중 극의 배우들이 복수극을 펼치고 처참한 최후를 맞는 걸로 오페라 <팔리아치>는 막을 내립니다.
내가 웃고 있나요
모두 거짓이겠죠
날 보는 이들의 눈빛 속에는
슬픔이 젖어 있는데
내 이름은 광대 내 직업은 수많은 관객
그 앞에 웃음을 파는 일
슬퍼도 웃으며 내 모습을 감추는 게 철칙
(리쌍, 광대)
프롤로그와 2막으로 구성된 오페라 <팔리아치>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요, 비극적인 최후에도 불구하고 빨간 분장으로 입꼬리를 한껏 올린 광대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더욱 처참하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문득 그동안 관람했던 오페라, 뮤지컬,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 속의 배우들을 떠올려봅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말 못 할 속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실제로 비밀 연애를 하는 드라마 속의 연인도 감정을 숨기느라 애썼을 테고, 이미 수습불가의 부부 사이라 해도 잉꼬부부인 척하느라 힘들었던 커플들도 있었을 테죠. 대중들에게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책임감의 무게가 뒤따를 것 같아요. 무대 위에 서는 사람들은 개인의 컨디션이나 사정을 뒤로하고 완벽한 광대로 노래하고, 연기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