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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순유 Mar 21. 2021

[내 생애 첫 오페라/내. 돈. 내. 산]

세빌리아의 이발사/largo al factotum della citta

 여고 시절 저희 담임선생님은 문학을 가르치는, 꽃미남의, 인기 최고의 선생님이셨어요. 그 또래 반 친구들은 악명 높은 선생님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똘똘 뭉치기도 했는데 우리 반은 마흔아홉 명의 팬클럽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선생님한테 예뻐 보이고 싶고 교사 체육대회가 있으면 똘똘 뭉쳐 응원하고 선생님의 주말 당직일에는 자진해서 학교에 나와 자율학습을 하곤 했죠. 같은 학교뿐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인기가 높은 선생님이셨어요. 담임을 맡고 계시던 해에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대표설화>라는 책을 출간하셨는데 가까운 사람이 책을 내는 게 너무도 신기했죠. 어느 날 종례 시간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책에 저자 사인 받고 싶으면 책 사서 교무실로 와라.” 그래도 담임 반 학생들인데 당연히 선물해주시지 않을까? 생각했던 저희는 약간의 실망감과 놀람을 동시에 느꼈어요. 그러고도 당연히 팬클럽 회원들답게 책을 사서 다음 날 교무실로 우르르 내려갔죠. 선생님은 한 명 한 명에게 정성껏 사인을 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다음에 너희들 중에는 가수도, 연극배우도, 작가도 나올 거야. 그때도 꼭 먼저 책을 사서 사인 받고, 먼저 티켓 사서 공연 보러 가주는 친구들이 될 수 있겠지?” 선생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수십 년이 지나도 저는 그날의 큰 울림을 잊지 못합니다. 실제로 저는 공연을 하는 사람이 되었고, 책을 내는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여전히 지인의 공연 또한 돈 내고 봅니다. 흔히 말하는 ‘내. 돈. 내. 산(내 돈으로 내가 산)’ 티켓이죠.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내돈내산만큼 감동적인 공연은 없더라고요. 뒤늦게 성악을 공부하여 이탈리아 유학까지 다녀온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가 오페라 무대에 오른 모습을 제일 처음으로 보았던 이 공연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세빌리아에 있는 ‘피가로’라는 이발사가 바람둥이 권력가인 백작과 한 아가씨를 중개해주는 이야기로 펼쳐지는데요. 가뜩이나 등장인물이 많아 헷갈리는데 내용도 숨고, 숨기고, 들키고, 몰래 도망가는 장면이 많아 정신을 쏙 빼놓는 작품이죠. 이 작품에는 유명한 아리아가 여러 곡 있지만 1막 초반에 피가로가 등장하면서 부르는 ‘largo al factotum della citta(나는 이 거리의 만물박사)’를 제일로 꼽고 싶어요. 피가로는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조연이지만 주인공 이상의 역할을 해내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제목부터 이 작품에서 피가로의 지분이 얼마나 큰지를 느낄 수 있거니와 관객들을 한방에 집중시키는 바로 이 노래 덕분이죠.



Largo al factotum della citta. Largo

la ran la la ran la la ran la la

Presto a bottega che l'alba e gia. Presto

la ran la la ran la la ran la la

Ah, che bel vivre, che bel piacere, che bel piacere

per un barbiere di qualita! di qualita

Ah, bravo Figaro! Bravo, bravissimo! Bravo


나는 이 거리에서 제일가는 만물 박사라네. 라르고

동이 트고 있으니 서둘러 출근을 해야지. 프레스토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가

이발사로 산다는 일은 말이야


 바리톤 파트가 맡는 피가로의 이 아리아는 이탈리아어 딕션이 속사포처럼 터져 나와 금방이라도 혀가 꼬일 것 같은 재미난 곡입니다. 이 빠른 가사를 외워 정확히 소화하고 동시에 가사에 맞춰 연기까지 해내야 하는 성악가들이 참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내용은 그야말로 자아도취에 빠진 가사이고요.


 지금이야 ‘헤어숍, 헤어살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예전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던 미장원이 있었죠. 온 동네 소식은 미장원에 가면 다 알 수 있었어요. ‘어느 집 아들이 전교 1등을 했다더라’, ‘누구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더라’, ‘그 집 남편이 바람이 났다네!’ 등의 동네 고급 정보는 아니어도 흥미진진한 소식들을 공유했던 곳이죠. 어쩌면 피가로는 19세기에 이미 그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로시니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는 이 곡 말고도 ‘una voca poco fa(방금 들린 그대 음성)’, ‘la calunnia e un venticello(험담은 미풍처럼)’ 등의 아름다운 아리아가 등장하는데 19세기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의 전성시대를 여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로시니는 열여덟 살에 첫 오페라 작품을 발표한 ‘오페라 신동’으로도 불리는데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만든 당시 나이가 스물셋이었다니 참으로 놀랍죠? 게다가 이 작품을 한 달 여의 시간에 만들었다고 하네요. 베토벤은 로시니를 만난 자리에서 ‘당신이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작곡가군요! 축하합니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존재하는 한 이 작품은 공연될 거예요. 희가극만 쓰도록 해요. 다른 스타일은 당신 성격에 맞지 않을 테니.’라고 했다는데 베토벤의 말대로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오페라 팬들의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보마르셰의 소설로부터 시작된 두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을 이어서 관람한다면 두 작품의 흐름을 더욱 잘 연결시킬 수 있을 거예요. 오페라

작품으로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보다 3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지만 원작의 순서대로 관람하는 게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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