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엔 너만 보여
중학교 시절 내가 다니던 단과 학원 앞에는 오락실이 하나 있었다. 많은 초중고등학생들이 그랬듯 오락실은 참새 방앗간 같아서 적어도 오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다. 처음 한 번은 주위 눈치도 보이고 학원에 땡땡이치는 것도 마음에 걸리지만 이게...... 한 번 발을 들이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 본 사람은 없는 그런 묘한 곳.
집에서도 심지어 오락실에서도 오락을 좋아했던 나는 초가을 잠자리 떼가 날아다니면 왼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 장면이 마치 갤러그 같아서 따다다다다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상상을 했다.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을 때 테트리스 벽돌이 우두두 떨어져 재빨리 왼손으로 모양을 바꾸고, 사탕을 먹고 더 많은 풍선을 뿜어낸다거나 신발을 신고 후다닥 날아다니며 뿅뿅 방울을 타고 올라가 보너스 과일을 먹는 보글보글을 상상하는 일은 정말 행복했다. 요즘 애들만 뭐라 할 것이 아니라 20세기의 우리도 분명 오락 중독자들이었을 거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성격은 못 되지만 나에게는 은근한 중독이 있다. 아무거나 막 시작하지는 않는데 한 번 시작하면 잘 끝내지 않는 성격. 그리고 조용히 중독되면서 웬만해서는 질리지 않는 편이다. 골프를 시작하고 처음 연습할 때는 '이거 연습한다고 나아지나?', '너무 늙은 나이에 시작해서 괜히 시간 낭비 돈 낭비하는 거 아니야?' 의심을 했지만 '지치지 않는, 질리지 않는' 나의 성격은 무언가를 배우기에는 꽤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나는 묘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것들이 다 골프와 연관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운전을 하고 가다가 초록의 넓은 들판을 봤을 때 예전의 나였다면 '저렇게 찐 초록의 들판이 곧 누렇게 변하겠지.' 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저것은 페어웨이인가, 러프인가?' 생각을 했고, 머릿속에는 온통 SNS 상의 유명한 프로들이 가르치는 드라이버샷, 아이언샷의 자세가 그려지곤 했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다.
한 번은 내가 근무하는 6층에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회사 건물 옆에 공사장이 보였다. 깜짝 놀랐다. '아니! 아니 저것은 대형 벙커잖아? 저 정도 벙커라면 그것도 두 개가 나란히 있으면 피할 수가 없겠는 걸?' 하며 머릿속으로는 웨지 풀 스윙을 그리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 넘들은 뻘뻘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공사 현장을 보며 대형 벙커라는 생각을 하다니 미안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 이건 서서히 젖어드는 중독이었다.
연상의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는 여자들이 집에서 아빠를 부를 때 '오빠, 오빠!'라고 불러서 민망한 상황이 생기곤 한다. 아빠한테 민망하고 미안한, 묘하게 싸해지는 순간. 오빠가 아빠가 되는 건 결혼으로 이어진 연애의 수순이기도 하다. 나는 드라이브와 드라이버를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골프 연습을 시작했던 때가 3월 말이니 4월 들어서면서 봄바람은 사람 마음 훔쳐갈 만큼 포근해지는 때여서 나는 콧바람이라도 쐬고 싶어졌다. 그때마다 전혀 어색함 없이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드라이버 갈까?'. 그것만 헷갈리면 되는데 오히려 연습장에서는 '선생님, 오늘은 드라이브하고 싶어요.'라고 했으니!
그리고 결정타는 바로 어제 아침의 일이었다. 사실 오늘 이 글은 어제 아침, 나의 증상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인형 뽑기 게임기에서 뽑아온(꽤 높은 수준의 결과물이다) 인형이 있는데 무려 프로도가 눈에 띄었다. '앗! 저거 솜을 파내고 우드 커버로 쓸까?' 순간 야금야금 속을 파내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납량특집의 귀곡산장 할머니가 떠올랐다. 안돼!!!!!!! 그것까지는 용서할 수 없어!!!!!! 골프는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고, 묘하게 빠져들게 하더니 이제는 묘하게도 미치게 만드는구나!
이 글 또한 여기까지 쓰고 나니 마치 내가 스코어가 엄청 좋은 골퍼처럼 착각이 들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직도 6번 아이언과 9번 아이언을 구분하지 못하는 한낱 골린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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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에진심입니다 #황순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