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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소도 Oct 22. 2023

엄마가 들춰보는 엄마의 일기

아이들에게 남길 엄마의 일기를 들춰보았다. 엄마가 쓴 일기를 엄마가 들춰보는 것이니 훔쳐보는 재미는 없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마음이 몽글몽글 해지는 면이 있다. 내가 써놓고도 조금 부끄러워 다시 들춰본 적은 없었. 이번에 이 글을 쓰며 다시 보니 '아이들에 대한 이런 감격과 감사가 있었구나. 저렇게 일기장에 꾹꾹 눌러써가며 다짐을 해놓고도 또 애들한테 소리를 질렀구나. 그렇게 노력해 써도 꼰대 같은 글이 존재하는구나.' 싶다. 


일부만을 남겨 놓자면, 이렇다.




2020년 11월 2일. 


... 그러니 너희들도 실수는 짧고 깊게 돌아보되, 오래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래 후회할 시간에 밖에 나가 바람이라도 한번 쐬고 맛있는 거라도 한번 사 먹고 잊으련. 그 어떤 일도 너희 자신보다 중요한 건 없어. 너희들이 건강하게 몸과 마음이 상하지 않는 게 훨씬 중요해.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은 그저 '일'일뿐이란다. 00와 00가 가장 중요해. 너희 자신이. 


그걸 꼭 기억하렴.




2020년 11월 3일.


오늘은 00가 정확하게 엄마를 보면서 "엄마!"라고 불러준 날이야.


잠들기 전에는 팔베개를 해줬는데, 엄마 쪽을 향해 돌아눕더니 엄마 얼굴을 손으로 잡고 뽀뽀를 쪽- 해줬단다.


아... 정말 그 기분은 너희도 자식 낳아 키워봐야만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정말 정말 사랑해. 엄마의 하루는 그것뿐이란다.




2020년 12월 23일.


집에 오는 길에 00 줄 한우 안심 두 덩어리랑 아빠 구워 줄 부챗살을 장 봐 왔단다. 


소고기의 철분이 뇌 발달에 중요하다고 하는데 소고기 기름이 몸에 좋지는 않을 것 같아서 자주는 아니고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먹이려고 하는 것 같아. 엄마 아빠가 크던 시절에는 다들 숭늉만 먹으면서도 잘 컸거든. 


그래도 좋은 거 먹이고 싶은 마음에 한우로만 사 왔어. 네 거 굽다 쪼가리가 떨어져 맛봤는데, 참 맛있더라. 아빠도 퇴근해 돌아와 부챗살을 구워줬단다. 아빠가 엄마도 어서 먹으라고 권했지만 너 먹이면서 배부르게 같이 먹었다는 거짓말을 했어. 그래도 마음이 참 좋았단다. 아빠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까.


그런 엄마를 보면서 외할머니가 떠올랐어. '아... 나의 엄마도 그랬겠구나...' 하는. 엄마라는 존재는 다들 그런 것인가 봐.


그리고 잊지 말아 줘. 엄마도 소고기를 좋아한단다. 나중에 엄마가 소고기를 먹다 사양하더라도, 꼭 엄마 입에 소고기를 넣어주련. 하하.




2021년 2월 22일.


오늘은 00가 처음으로 열이 많이 난 날이었어. 낮잠을 잘 자고 일어났는데 열이 38.1도 더라고.


'자식대신 부모인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말의 뜻을 오늘에서야 이해했단다. 온몸이 뜨끈뜨끈한 너랑 살이 닿을 때마다 엄마 몸에는 열꽃이 피는 기분이었어. 네 몸의 뜨거움이 엄마에게는 화산보다도 뜨겁게 느껴졌단다. 잠깐만 살이 스쳤을 뿐인데도 그 자리가 얼얼하도록 화끈거리는 느낌이었어. 


살면서 처음 느껴본 감촉이었는데, 엄마는 너희를 키우면서 많은 것들을 처음 해보고 느껴보고 있어.




2021년 6월 21일.


요즘 00는 아랫니가 나고 있어. 세 개가 한꺼번에 올라오는 게 힘든지 가끔 칭얼댄단다.


참고로, 00(첫째)는 2020년 6월 22일에. 00(둘째)는 2021년 5월 28일에 첫니가 났단다. 너희 몸 안에 이렇게 단단한 게 어디 있다 밀고 올라오는지 참 신기했어. 너희의 모든 처음은 엄마아빠에게 너무 소중하고 큰 기쁨이란다.




뒤로 갈수록 일기인지 반성문인지 모르겠어서 이쯤에서 멈춘다. 마냥 감격스러운 이야기만 담기던 초반과 달리 아이들이 커갈수록 반성문과 진술서에 가깝게 변해가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봐도 좋은 마음이 든다. 분명 아이들이 다 자란 후에 보는 내 일기장은 좋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나의 기록을 통해 무엇이든 하나는 건질 것이다.


그게 교훈적인 것이 아니어도 충분하다. 나의 은근한 개그 코드를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몸도 마음도 비에 젖은 것 같은 어느 날 내 한 페이지에서 조금이라도 젖은 마음을 말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조금 덜 축축한 마음으로 힘을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싶다.


글에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나와 당신을 연결시키듯이. 나와 내 아이들도 연결시켜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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