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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소도 Oct 22. 2023

망중한

: 바쁜 가운데 한가로움

아주 예전에 그런 꿈을 꿔본 적이 있다. 오늘의 모습을 가진 나도 없고 이런 직업을 갖고 살아본 적도 없던 것처럼 외딴섬에 들어가 사는 상상. 아마도 요즘의 한 달 살기에서 좀 더 오래 노동하며 살아보는 것과 비슷한 맥락 일 것이다.

내 주변에 딱 한 사람 정도만 남겨놓고 모든 인연은 끊어내고 내려가는 거다. 정말 정말 외롭고 그리운 어느 날 연락 할 단 한 사람만을 남겨놓는 것이다. 아주 한적하고 인적 드문 시골 섬에 들어가 토박이 주민들과 뒤섞여 바다일 이나 농사일을 하며 촌사람으로 늙어가는 모습을 그려본 적이 있다. 

그러고는 단순하고 고된 일을 하면서 먹고 자고 쓰고 싶을 때 글이나 몇 자 적으며 사는 거다. 어디서 뭐 하며 살다 왔냐고 누군가 묻거든 그냥 서울에서 살다 왔다는 대답으로 어물거리며 지루한 일상을 살아보는 것...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더랬다.

이뤄지기엔 턱도 없다는 걸 너무 잘 안다. 한낮의 망중한에 빠지듯 종종 꿈만 꿔봤던 상상이다. 


내가 결혼을 못하고 죽을 것 같은 확신이 들던 때 했던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운 노후대책이 섬으로 도망가 사는 것이었다. 이제 생각해 보면 젊으니 할 수 있었던 상상 같다. 그러면서도 참 멋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얼까...?


그렇게 살아보지 않아서- 앞으로도 할 수 없는 일 같아서- 동경해 보는 것이다. 암에 걸리고 보니 암에 걸린 사람만 아니면 죄다 부러워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부러워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할 일이 없었다. 


건강한 이들이 부럽다고 해서 운동을 안 하던 내가 하루아침에 태능인이 되지는 못했다.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은 쉽게 들지 않았다.


'망중한'의 지식적 의미는 바쁜 가운데 한가롭다는 뜻이다. 바쁜데 한가롭다니... 이질적이면서도 한데 어우러지는 뜻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하루는 전장과도 같다. 그럴 때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 애들을 다 재우고 난 후에나 나는 나로 돌아온다. 


그때서야 슬프기도 하고, 룰루랄라 즐겁기도 하고 그렇다. 어느새 내 삶은 이전과 같이 큰 요동 없는 평범한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정신없이 바쁠 때는 바쁜 대로 살고, 한가로울 때나 한 번씩 암의 존재를 떠올리는 상태가 되었다. 




소포성림프종을 확진받고 1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좌절로 시작해 내 병이 어디서 왔는지를 색출하려는 분노와 억울의 시기를 지나, 이제야 좀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여러 생각의 갈래 위에서 외줄 타기를 한다.


전에 없던 통증이 생기면 이게 암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를 몰라 불안해진다. 당장 내일이라도 예약을 해 진료를 받아보고 싶어 진다. 그러다가도 마음이 좀 가라앉으면 또 잊고 잘 산다. 영원히 살 사람처럼 마음을 느긋하게 먹는다.


조금 슬픈 날에는 센티해졌다가, 괜찮은 날에는 좀 더 기뻐하면 된다. 마냥 슬픈 날만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항시 괜찮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세상의 만사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법이니.


영원한 멘털도, 영원한 생명도 없다. 우리의 존재가 그렇듯 유리 같은 내 정신상태를 붙들고 어떤 날은 실금도 가고, 어떤 날은 깨지기도 하면서... 이어 붙여가며 살아가면 될 것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나는 전과 똑같이 태평하면서 조금 게으르게 살 것이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나를 들여다보고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발견하고 찾아낸 나 자신이 결국 내일의 나를 살게 할 것이라 믿는다. 


초점을 삶의 종료에 두지 않고 진행 과정에 둘 것이다. 전처럼,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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