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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안이혜 Sep 06. 2019

2. 나 같은 사람은 필요 없나요?

5년 차 대리 A씨의 직업을 알려주세요.

세상은 확실히 자극적인 것을 좋아한다.


방송, 광고, 드라마를 비롯해 영화, 책, 강연, 심지어 어린이 호스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마저 이전보다 더 자극적인 것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런 흐름이 취업 시장이라고 예외일까.

강력한 포트폴리오, 고득점으로 증명되는 외국어 실력, 어마어마한 두께로 기를 죽이는 이력서와 웬만한 40~50대가 일생 동안 채우라 해도 채우지 못할 경력증명서까지.

끝을 모르고 치닫는 이 시대의 요구사항들을 우리의 젊은이들은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다.

그러니 나와 같은 어중 떼기 넓발이들은(넓은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는 어정쩡한 사람들)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진다.


점점 더 자극적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심심한 스타일들은 경쟁력을 잃어간다 (출처: unplash by Mohammad Faruque)



전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 말을 꺼낸 사람은 서른 살의 5년 차 리 A 씨였다.

그녀는 첫 직장부터 지금까지 지인들의 소개를 통해 입사해 올 만큼 어떤 업무에도 능한 재원이었다.

그런 그녀가 오랜만에 마주 앉은 나에게 대뜸 이런 말을 뱉은 것은 꽤나 의외였다.


"왜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내세울 게 으니까요. 그 흔하다는 토익도 없죠. 학교 성적도 그저 그렇죠. 자격증도 운전면허증이 다인 걸요. 다른 곳으로 회사를 옮기고 싶어도 갈 데가 없어요."


그녀의 푸념은 곧 나의 것이기도 했다.

나 역시 15년쯤 전에 획득하여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토익 점수가 외국어 흔적의 전부이고, 23살에 인도에서 취득했던 SCJP가 무색하게도 지금은 프로그래밍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A씨처럼 1종 운전면허증 외에는 이렇다 할 자격증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까닭에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살에 에이듯 박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휘젓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저는 잡코리아 볼 때마다 자괴감을 느껴요. 엄청나게 많은 직무 중에서 자신 있게 지원할 수 있는 것이 단 한 개도 없어요. 그래도, 저 경력 5년 차인데 말이에요. 흐흐"


우리나라 대표 취업 포털 잡코리아의 직무 구분 (출처: 잡코리아)



문과형 인간 vs 이과형 인간


2022년 전격 폐지된다는 문과와 이과는 내가 단발머리 여고생이던 20여년 전에도 존재하던 제도였다.

나라는 존재가 과연 문과형 인간인가 이과형 인간인가를 가늠하기에, 17살의 나는 지나치게 어렸다.

그 시절의 나는 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사랑하는 감성 충만한 소녀였지만, 동시에 딱 떨어지게 정리하고 일목요연하게 A-Z로 만들기를 좋아하는 냉정한 청소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문과와 이과 중 어디에 더 가까우냐는 질문에 선뜻 답을 하지 못하겠다.

그렇게 칼 같이 나눌 수 있는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딱 잘라 여기까지를 이 업무 그다음부터는 저 업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실제로 대부분의 업무는 무 자르듯 나눌 수 없는 애매모호한 경계를 앞에 두고 갈등을 야기한다.

그로 인해, 지금 이 시간에도 회의실에 앉은 이들은 그들의 앞에 놓여진 업무가 과연 누구의 것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거듭하고 있다.

이는 책임감 없는 조직 속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점점 더 오버랩되고 유연해지는 업무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지금의 기업 시스템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거나 탓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어쩌면,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은 아닐까?


물론 모든 회사와 조직이 역할로 인해 혼선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업무가 모듈화 되어 착착 돌아가는 중견 규모 이상의 기업은, 업무의 구분과 이해가 명확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오류없이 해 내는 데에 몰두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중소벤처기업부의 2017년도 발표에 의하면 중소기업수는 58만 518개로 전체 기업수의 99.2%에 달하고 근로자 비율도 88%에 육박한다고 하니, 10명 중 8명의 직장인들은 위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52시간 근무제가 보편화 되면서 기존 근로자들의 투잡, 쓰리잡이 활성화 되고, 이로 인한 소규모 비즈니스나 중소기업이 늘어나고 있으니, 1인 다역을 소화해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시대의 요구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육아로 중지되었던 경력을 걷어내고도)15년이나 되는 업력을 지닌 나는, 잡코리아의 직무 테이블에서 나의 자리를 찾을 수 없다.

일 잘하는 5년 차 대리 A 씨의 고민 역시 이 지점 어딘가에 닿아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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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 할 줄 아는데, 갈 수 있는 곳이 없어〉(잡코리아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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