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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Nov 18. 2018

나보다 늦게 온 엽서

장애물들을 고려한다면,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를 잇는 선은 곡선일 것이다.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중, 베르톨트 브레히트





첫 배낭여행을 떠난 몇 주 뒤,
인도의 하이데라바드

며칠을 머물다가 하루를 잡아 중앙우체국에 갔다. 

전날 밤, 그곳에 오기 전에 들렀던 여행지에서 산 조악한 엽서에 내용을 미리 써놓은 상태였다. 받는 사람 칸에는 여행 전에 미리 받아놓은 친구들의 주소를 꾹꾹 눌러쓰고 아래에 'SOUTH KOREA'라고 크게 쓰고 밑줄을 여러 번 그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나는 건, 하이데라바드 우체국의 높은 천장, 창구에 있던 남자 직원의 근엄함(과 그에 어울리는 매우 느린 일 처리), 엽서를 다 보내고 난 후 잔돈을 받을 때의 뿌듯함, 건물을 나선 후 더위를 피해 들어간 과일 주스 집의 서늘한 공기 등이지만, 당시의 나는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해치웠다는 뿌듯함과 홀가분함을 느꼈다. 



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 하이데라바드에서 보냈던 엽서는, 내가 두 달의 비자 기간을 꽉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야 도착했다. 엽서를 받은 친구들은 저마다 내게 엽서가 왔음을 알려왔다. 허세 가득한 내용보다는 한 달 넘게 이국의 공기 속을 떠돌다 제대로 도착한 것을 신기해하면서. 친구들이 고맙다고 할 때마다, 나는 나한테도 누가 이런 엽서를 보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먼 나라에 갔을 때 종종 나 자신에게 엽서를 보낸다.


나와 비슷한 것들이, 나보다 늦게 돌아오길 바라면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여행은 길어야 10일 안팎.

'평소의 나'한테서 조금 멀어져 있는 나는, 곧 익숙한 곳으로 돌아갈 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안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느낌이건 간에, '그곳에 있는 나'를 조금 더 지속시키고 싶어진다. 몇 주, 혹은 한 달이 넘어서 도착할 소식에 기대서. 


내용은 평범하다.
한글을 모르는 이국의 우체국 직원들은 물론이요 한국의 우체부들이 봐도 무방하도록, 들뜬 여행자가, 그 들뜸을 나누고픈 누군가에게 보내는 엽서를 가장한다. 누가 보기 애매한 내용을 남기고 싶을 때는 문자와 숫자, 기호의 조합을 적는다. 길게 적은 고민의 '원본'은 여행 수첩에 적어놓고, 엽서에는 그 내용에 대한 암호 같은 가이드를 적는다. 그렇게 내 손은 떠난 엽서는, 내가 마지막까지 '급작스러운 공항 폐쇄' 같은 기대를 버리지 않은 채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별다른 방도 없이 빠르게 일상에 복귀할 때에도 여정을 계속한다. 그렇게,


어느 나라에 가건, 엽서는 늘 나보다 늦게 도착한다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건너온다는 건, 그 사이에 있는 모든 물리적인 것들을 거친다는 뜻이다.

염료가 적힌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엽서는, 그 나라에서 이 나라로 오는 느린 동선을 거치며 정작 여행자인 나는 거치지 못한 물리를 경험한다. 엽서에 지문을 묻힌 사람들의 시선과, 장소를 옮길 때마다 달라지는 공기의 온도, 거기에 내리쬐는 햇볕의 두께 같은 물리를. 그리하여 몇 주 뒤 내가 여행의 흔적에 덮개를 덮을 즈음,


잊고 있던 엽서가 당도하면,
그곳의 물리가 이곳의 주위에 살아난다.

도미토리 침대에서, 촛불만 켜 있던 골목 술집에서, 비오는 날 성당의 지하 벤치에서 적은 문장들은 먼 거리를 지나왔음에도 결코 낡지 않는다. 과도하게 증폭된 외로움과 고민들은 그대로고, 스스로에게 내놓는 명쾌한(반드시 실천하리라 확신했던) 해답도 그대로다. 


하지만 엽서는 나보다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왔다는 이유로,

'일상에 조급해하는 나'를 살짝 지워놓았다. 여행만이 줄 수 있는 환각인 것처럼. 

그것만으로도 굳이 시간을 들여 나 혼자 읽을 엽서를 보내는 시덥잖은 행동은 보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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