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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Nov 30. 2021

국물 송볶이

시작은 한 웹소설의 작가 후기였다. 


늘 짧게 한 마디씩-주로 그날 먹었거나 먹고 싶은 음식 이름에 대해- 남기는 

그 작가가 말한 음식 중의 하나가 이거였다. 

아마도 글을 쓴 건 추석 후 어느 즈음이었지 싶었다.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라고 쓴 그는 이어서, "송볶이라고 해야 하나"라고 적었다. 



웹소설을 끄고 냉동실을 열어보니, 그 작가의 집처럼 '철 지난' 송편이 있었다. 

원래 떡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송편의 텁텁함까지 내켜하지 않으니, 

집에서 싸오자마자 냉동실로 직행한 송편이었다. 


남겨진 명절 음식이 으레 그렇듯, 형태 그대로 먹을 의욕은 들지 않는 송편을 바라보다가,

작가가 말한 송볶이를 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사를 앞두고 냉동실을 정리해야 했고, 잠깐 검색한 국물 떡볶이 레시피에 있는 재료가 

몇 개 빼고는 거의 다 있었기도 했거니와, 그리고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검색한 대로, 물 600ml에 고추장 두 스푼을 푼다. 고춧가루는 없으니 패스. 

설탕 두 스푼을 더하고 뭔가 좀 아쉬워서 눈에 띈 올리고당을 한번 짜준다. 


조미료를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왠지 이도 저도 아닌 평균적인 맛이 될 듯해서, 그만둔다. 



꽝꽝 얼어있던 송편을 그대로 우르르 넣고 끓인다. 

해동을 하면 좋았겠지만, 어차피 끓으면서 다 녹지 않을까.


간장을 숟가락에 재지 않고 눈대중으로 넣는다. 

떡이 이상한 건 차치하더라도 어묵도 대파도 없으니 제대로 된 떡볶이가 되지 않으리라는

묘한 포기 아닌 포기 모드였기에, 계량 대신 감을 믿기로. 


그렇게 더 끓이니 집안에 떡볶이집에서 맡던 향이 퍼진다. 

별 거 아니네, 라는 혼잣말은 나왔다가 들어간다. 



양파의 무른 겉 부분을 벗겨내고 남은 부분을 자른다. 

도마째 들어 우르르 넣으니 이내 국물 속에 잠긴다. 


뒷베란다에 걸린 양파망에는 이제 한 개의 양파가 남았다. 



이사를 갈 집에 가스레인지가 있어서 지금 쓰고 있는 가스레인지는 놓고 가야 한다. 

너무 낡고 오래돼서 오히려 짐을 두고 가는 게 아닐까 싶어서, 얼마 전에 집주인 아저씨에게 말했더니,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놓고 갈 거 있으면 편하게 놓고 가도 된다'라고 말한다. 

만 14년 반을 산 이 집에 대해, 나와 집주인 아저씨의 애착은 어쩌면 비등비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어컨과 세탁기, 욕실 난방기도 놓고 가기로 한다. 

이 집에 있을 때의 소용을 충분히 다한 것들이다. 

왠지 다른 집으로 옮겨가면 못 어울리거나 무리할 듯한 그런. 

주말에 먼지와 기름때를 닦아놓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송볶이를 끓이는 동안 주방에 뭐 정리할 거 없나 살펴보다가 파스타 면을 발견했다. 

새로운 시도는 잘 안 하는 편인데, 뭐에 홀린 듯 주섬주섬 통을 열어 반 줌을 꺼낸다. 


국물 떡볶이에 라면 사리도 넣어서 먹으니 이것도 넣으면 비슷해지겠지,

라는 단순한 생각에 반으로 잘라 쿨하게 넣어준다. 


이게 과욕이었다는 건, 한참을 끓여도 뻣뻣한 면을 보면서 뒤늦게 깨닫는다. 

아예 처음부터 넣거나 넣지 않는 게 낫지 않았나 싶은 후회를

덜 익은 면도 먹을 만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덮는다. 


송편을 젓가락을 찔러보니 잘 들어간다. 

면을 위해 전체를 더 끓일 수는 없으니 불은 끄기로 한다. 



큰 기대는 없었는데, 의외로 학교 앞에서 먹던 떡볶이 맛이 난다. 

송편은 송편 맛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조금씩 잘라 국물에 적셔 먹으니 먹을 만하다. 

뒤늦게 넣은 면은 반쯤 익었는데 살짝 오독 거리는 게 나쁘지 않다. 


이 동네, 이 골목 특유의 소음이 닫힌 베란다 문 사이로 들린다. 

간간이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와 늦은 밤 낮게 대화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한밤중이라 유난하게 들리는 떡 씹는 소리와 섞여 왠지 적당한 느낌이다. 

이사를 결정하고 처음에는, 오래 살던 이곳을 떠난다는 게 아쉬웠는데

이사 준비를 하면서 조금씩 마음이 편해지고 있다. 

오히려 내 주위 사람들이 더 아쉬워할 정도다. 


우리는 어느 곳에든 머무르는 게 아닐까 싶다. 

오래 머물렀다고 한 시절을 소유할 수 없고, 짧게 머물렀다고 그곳을 소홀히 여길 수 없다. 

시간의 흐름처럼 한 장소를 한 동네를 스쳐 지나더라도,

그곳에 살면서 즐겼던 익숙한 편안함은 내 안 어딘가에 남아있지 않을까. 


그렇게, 

접시를 비우고 익숙한 포만감을 잠시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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