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의 어제일 뿐, 나의 내일은 될 수 없다.
차랑, 소리를 내며 얼음이 또 하나 미끄러졌다. 자그마한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유리잔에 손을 가져다 댄다. 기분 좋은 차가움이 손끝을 타고 전해온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비 냄새가 묻어난다. 하늘은 흐리지 않은데, 어째서일까?
나는 지혜 언니의 신작을 읽고 있다. 이번 소설은 언니답지 않게 무척이나 달콤한 이야기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방금 읽었던 책의 구절을 생각한다.
- 결국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나게 된다는 말은 진짜야.
- 운명 같은 거?
몇 번의 엇갈림 끝에 재회하게 된 연인이 주고받는 대화.
“오래 기다렸니?”
낯익은 목소리에 나는 눈을 뜬다. 그리고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한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아뇨, 조금 전에 왔어요.”
“얼음이 다 녹았는데?”
“날씨가 덥잖아요.”
“안에 앉질 않고?”
“그냥, 바람이 좀 부는 것 같아서요.”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는 것이 운명이라면 내게 이 사람은 운명일까? 그렇다면 대체 일생에 운명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 걸까? 한창 사랑을 할 땐 서로가 운명이라고 굳게 믿지만, 또 끝나고 나면 그것은 운명도 뭐도 아니었을 뿐인 그런.
“지혜씨 책이야?”
“네.”
“어때?”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한다, “언니가 사랑에 빠진 모양이에요.”라고. 지금 내가 운명이라 굳게 믿고 있는 사람도 나를 따라 가볍게 웃는다. 나는 저 관대한 미소에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으며 또 얼마나 많이 의지하고 있는 걸까? 이 믿음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선배, 뭐 마실래요?”
나는 덜컹,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냐, 내가 갈게.”
그가 일어나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불안했던 마음이 일순 가라앉는다. 그래, 어차피 그는 잠시 이곳에 머물다 다시 떠날 사람이고, 나는 이곳에서 나의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잠시 옛 추억이 떠올랐을 뿐. 그는 나의 어제일 뿐, 나의 내일은 될 수 없다.
나는 그때 어렸고 지금도 어리지 않다고 말할 순 없지만, 분명히 그때의 나는 미성숙했고, 우리는 모두 그랬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그 누구는 또 누구를 좋아하고, 그런 일들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았던 시기. 이제는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번뜩 정신이 든다. 내 맞은편에 앉으며 그는 나를 향해 빙긋 웃는다.
“선배.”
“응?”
“혹시 기억나요?”
“응?”
나는 책을 덮은 후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턱을 괸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초연한 말투로 그 이름을 내뱉는다.
“윤현이요.”
그는 잠시 놀란 기색이더니 이내 미소를 머금는다.
“기억하고말고.”
“그저께 지혜 언니 사인회에 왔었던 모양이에요.”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살핀다.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선배, 만약에 그때 내가 윤현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나는 꽤 오랫동안 미련하게 굴었지만, 이제는 왠지 그 의미를 알 것 같아요. 어디에도 의미 없는 일은 없어요.”
어디에도 의미 없는 일은 없다, 그 말의 뜻을 나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나는 그 말을 이해했던 걸까? 그는 내 말에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다 컸네, 우리 꼬맹이.”
“지나가다 생각나서 연락해 봤어.”
정말 오랜만에 만난 선미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졸업식 때였던가. 아니, 파리에 다녀온 후에 잠깐 얼굴을 봤었다. 우습게도 대학시절 친구들 중에 지금까지 연락이 닿는 건 선미뿐이다. 가장 친해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가장 오래 만나고 있다니, 역시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을 모르는 모양이다.
“잘 지내?”
“응, 넌?”
“나야 항상 그렇지.”
형식적인 안부를 나누고 우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우리 사이에는 많은 공백이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혹시라도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야만 한다. 우리는 친구도 아닌, 그저 함께 대학 생활을 공유한 어떤 사이일 뿐이므로.
“사실은 연주가 다음 주에 한국에 들어온다고 해.”
선미가 조심스럽게 낯익은 이름을 입에 올린다.
“그래? 완전히 귀국하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잠깐 있다가 다시 돌아가는 건가 봐.”
“그렇구나. 연주는, 연주는 잘 지낸대?”
한때는 내가 제일 좋아했던, 그래서 제일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
“연주야 걱정할 필요도 없지, 뭐.”
선미가 약간 과장된 말투로 약간의 비꼼을 담아 대답한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새로운 사건들이 생겼고, 또 많은 사람을 더 만났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 이상 연주를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는 너무나 완벽해 보였던 연주, 하지만 더 넓은 세상 속에서는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사람이었다.
“연주가 계속 네 소식을 궁금해했었어.”
뜻밖의 말에 나는 잠시 숨을 멈춘다. 그해 여름 후로 우리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졌다. 연주는 몇 번인가 내게 알은체를 해왔지만, 번번이 그녀를 피한 것은 나였다. 나는 창피했고, 또 미안했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그해 여름의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이 내게서 멀어져 갈 때마다 나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입곤 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갔고 나 또한 어른이 되어갔다. 더 이상 짝사랑에 전전긍긍하지도 않고, 순간의 감정에 휩쓸리는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는다. 사람의 호의는 일단 한 번 의심하고, 타인의 불행에는 무관심하다.
“이번에 들어오면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말도 했어.”
나는 연주의 말이 진심인지 그저 ‘다음에 밥 한 번 먹자‘와 같은 말인지 알 수 없다. 선미는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진심인 것 같았어.”라고 덧붙인다. 나는 조그만 미소를 지을 뿐이다.
“난 그만 가봐야겠다, 잠깐 나온 거라서.”
나와 선미는 짧은 인사를 나누고 “다음에 또 보자.”라며 헤어졌다. 선미를 보내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나는 무더운 여름 햇볕 아래서 잠깐 현기증을 느낀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해 여름, 그것은 현실이었을까?
그가 출장을 간 주말, 스물여덟의 여자에겐 주말에 마음 편히 불러내 놀 친구는 없다. 모두가 저마다의 연애, 저마다의 가정, 혹은 저마다의 업무로 바쁘다. 남은 사람이라곤 회사 사람들 뿐. 인간관계란 게 원래부터 넓지 않았던 나는 더더욱 지루한 주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틀간 내리 내리던 비가 멎고 날은 화창하게 개어있었다. 집에만 있기엔 아쉬운 날씨라서 편안한 차림에 책 한 권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하얀 건물이 가까워온다. 이제는 그저 집 근처의 카페일 뿐일 그곳. 한때는 나의 일터였고, 나의 추억이었고, 그가 있었던 곳이었지만.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키고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의 ‘윤후’는 결국 겨울이 오기도 전에 시들고 말았다. 엄마와 내가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소용없었다. 나는 지금 내가 앉아있는 자리 즈음에 나란히 서있던 푸른 생명체들을 생각한다. 그날 이후로도 이 장소에는 수없이 드나들면서 언제부턴가 덤덤해질 수 있었다. 이토록 마음이 울렁거린 것은 오랜만이었다. 더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책을 펼쳤다. 몇 번이나 읽기를 시도했다가 포기한 인문서적이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치는 부분은 없는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야 겨우 이해를 할 수 있는 책. 그렇게 나는 책과의 싸움에 몰두하고 있어,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불쑥 끼어든 목소리를 인지하는 데는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내 눈앞에 선 ‘증오의 대상‘을 발견했다.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네?”
앳된 소년 같았던 얼굴에서는 성숙함이 묻어났고, 눈가엔 보기 좋은 주름 한 가닥이 생겼다. 짧았던 머리는 세련되게 스타일링 되어 있었고, 산뜻한 셔츠와 은은한 컬러의 팬츠는 멋스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언제나 심술 난 것처럼 보였던 얼굴에는 차분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윤현, 내 눈앞에 스물여덟의 윤현이 있었다.
“앉아도 될까?”
“응.”하고 나는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내 맞은편 의자에 앉고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다.
“오랜만이야.”
“으, 응.”
“여전하네, 넌.”
그의 자연스러운 태도에 나는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기만 했다. 이런 장소에서 예기치 않게 만나게 된 것도 당황스러운데 이렇게 낯선 사람이 내 앞에 앉아있다니.
“여기는 많이 변했고.”
그는 아까 내가 창가의 화분들을 떠올릴 때처럼 그리움을 담아, 휙, 카페 내부를 살핀다. “여기가 아직 있을 줄은 몰랐어.”라고 덧붙이며.
“한다아?”
그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에 비로소 나는 정신이 들었다. 그래, 이 사람은 윤현이야. 그토록 미워하고 그리워했던 그 윤현. 나는 표정을 다잡았다. 그가 변한 것처럼 나도 변했다. 이제는 그렇게 쉽게 휘둘리지 않아, 나는.
“너는 많이 변한 것 같네.”
내 말에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표정이 다양한 사람이었구나, 너는 원래.
“한국에는 완전히 돌아온 거야?”
“음, 아니 잠시 휴가 중이야. 친구가 교포인데 한국에 와보고 싶어 해서 겸사겸사.”
“그렇구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데?”
“스페인에 있어, 바르셀로나.”
스페인, 바르셀로나. 원래도 그는 가깝게 여겨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머나먼 곳의 이름에 나는 더더욱 거리감을 느꼈다. 한때는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우리는 완전히 달라진 거야.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
“가우디의 도시에 있구나.”
“응.”
아무리 그리워한다고 해도.
“언제 돌아가?”
“내일 아침 비행기로 돌아가. 친구가 오늘은 쇼핑을 하고 싶다고 해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그가 말하는 친구가 지혜 언니가 말한 그의 여자 친구겠지?
“그렇구나, 내일 돌아가는구나.”
“너는 어떻게 지내? 잘 지내니?”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뭔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만나게 될 줄이야.
“그냥 그렇지, 뭐.”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자 우리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오랫동안 말없이 함께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던,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것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나는 이 침묵이 불편했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
나는 시계를 힐끗 보며 약속이 있는 사람처럼 짐을 챙긴다. 그는 턱을 괸 채로 물끄러미 나를 본다.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허둥거리지 않고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애쓴다. 설사 거짓말이 티가 나더라도 어쩔 수 없다.
“한다아.”
그가 익숙한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손을 멈추고 그를 본다.
“만나서 반가웠어.”
천천히, 나지막이, 그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응, 나도.”하고 나는 웃었다. 언젠가 또 만나자,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우연히 한 번 만난 걸로 충분하다. 어딘가 미완성인 채로 있었던 우리의 만남이 이로써 완전히 종결된 셈이니. 됐어, 그걸로 정말 안녕!
나는 그렇게 우리의 어제로부터 걸어 나왔다.
톡, 톡, 톡.
“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다닥, 사람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나는 우두커니 횡단보도 중간에 서있었다. 녹색불이 선택을 재촉하듯 깜빡인다. 나는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한다.
기다려, 제발 기다려!
굵어진 빗방울을 온몸으로 맞으며 나는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머리와 옷이 제법 촉촉하게 젖을 즈음 나는 카페에 도착했다. 문을 쾅, 열고 들어섰지만, 아까 그 자리에 그는 없었다. 텅 빈 테이블 위에는 내가 먹던 음료의 빈 잔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손님?”
점원이 다가와 내게 말을 건다.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 만다.
“없어, 가버렸어.”
또 놓쳐버리고 말았다. 나는 터덜터덜 카페를 돌아 나왔다. 그리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빗속에서 규칙적으로 떨리고 있는 남자의 등을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갑자기 돌아보는 바람에 나는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남자의 얼굴은 흠뻑 젖어있었다. 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도 못한 채로 멀뚱히 서있었다.
“한다아.”
그리고 그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 있잖아, 그때 나도 널 좋아했었어.
- 역시 넌 바보야.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 건.
너의 그해 여름은 행복했었니?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