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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제이 Oct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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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추억이 남겨준 기억

추억, 그리고 기억

우리 엄마는 열아홉에 여덟 살 연상의 아빠를 만나 결혼하고, 스무 살에 저를 낳았습니다. 아마, 엄마는 어릴 때 결혼하고 저를 낳은 것을 창피하다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제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엄마는 저에게 늘 같은 나이를 말씀하셨으니까요. 참, 몇 년을 서른다섯의 나이로 사셨는지요. 그런 저는 그 시절에도 엄마의 마음을 안 것일까요. 한 번도 엄마의 나이를 되묻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 엄마가 다른 친구들의 엄마들보다 예쁘고, 젊은 엄마여서 너무 좋았으니까요.


그런 엄마와 결혼한 아빠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아빠는 엄마가 예뻐서 결혼했겠지만, 엄마는 잘생긴 아빠보다 어쩌면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가 좋아서 결혼한 것이 분명합니다. 엄마는 친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고, 친할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까요. 지워진 도장 자국처럼 아주 흐리게 남은 할머니가 계시던 때의 기억은 숨바꼭질하다가 들어간 할머니의 옷장에서 나던 할머니의 냄새를 불러오며 저를 그때로 돌아가게 만들곤 합니다. 


엄마와 할머니가 장난치고 웃던 어린 날의 기억을 꺼냅니다. 몇 안 되는 어릴 때의 추억이네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딸이 귀한 집에 태어난 저를 예뻐했습니다. (처음에는 딸이라 실망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물론 세 살 터울 동생이 태어나고 제가 샘이 많아서 할아버지한테 많이 혼났다고 하지만요. 저를 나무라는 할아버지를 향해 앙칼지게 ‘하부지 미워!’라고 소리 지르기도 했다는데, 희미하게나마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을 짓네요.


그래도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정말 예뻐했다는 걸 이제는 잘 압니다. 이웃 마을에 갈 때마다 저의 재롱을 자랑하시려 데리고 다니셨는데, 그때 등 뒤에서 들리던 할아버지의 음성과 웃음이 희미한 느낌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할아버지 자전거 앞에 매달려 다니는 것을 저도 많이 좋아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네다섯 살 때인가, 하루는 할아버지랑 이웃 마을에 놀러 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날은 할아버지가 친구분들이랑 노시면서 막걸리 몇 잔을 걸치시고는 자전거 음주운전을 하신 날이었습니다. 술 냄새도 나지, 자전거는 자꾸 비틀거려서 제가 짜증을 냈는데, 그때 집 앞 정미소 앞 돌길로 운전을 잘못하신 바람에 꽈당! 쓰러졌지요. 할아버지도 넘어져서 다치셨는데, 제가 자지러지게 울어대고 난리가 나서 저를 보니까 왼쪽 팔이 빠졌더래요. 할아버지는 술이 번뜩 깨선, 그 놀란 와중에 제 어깨뼈를 맞춰 끼워주셨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 어깨로 건강히 살고 있지요. 하핫. 그때 저도 많이 놀랐던지, 다 커서도 그날 넘어졌던 장면은 꿈으로 나타나기도 했답니다. 부모님은 이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저를 신기하게 보십니다. 그렇게 저에게 소중한 추억을 주신 할아버지의 놀란 모습과 저를 안심시키시려 웃으시는 모습, 목소리가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밥 먹을 때 젓가락질을 잘 못 한다고 다섯 살짜리 고명딸을 숟가락으로 이마를 때리시고, 동생 괴롭힌다고 벌을 주시던.     


할아버지를 이렇게 추억하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할머니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계절의 기억. 봄이 되면, 엄마와 할머니 손을 양손에 잡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쑥 캐러도 다니고, 민들레 씨앗 풍선이 보일 때마다 불어주고, 할머니께서 진달래잎을 따다가 쪄 주신 떡도 친구들과 나눠 먹었지요. 여름이면, 찌그러진 대야에 받아놓은 찬물에 발 담그고 수박 깨서 먹고, 찐 옥수수도 먹고, 쫀득한 감자도 갈아서 전을 부쳐 먹었고요. 할머니가 손끝에 투박하게 감아준 봉숭아 꽃잎 물들이기는, 여름이면 빼놓을 수 없는 엄마와 제가 함께 즐기는 최고의 취미였답니다. 가을이 되면, 메주가 동동 매달려 있던 처마 끝에서부터 시골 냄새가 피어납니다. 청국장, 된장, 간장, 고추장 담그는 것도 직접 보고, 아궁이에 불 때며 고구마를 구워 먹다가 아궁이에 넣지 말아야 할 밤을 집어넣어 그 밤에 딱밤 맞고 울던 기억도 있습니다. 더불어 할머니께서 힘들게 턴 참깨가 든 키를 뒤집어썼다가 할머니에게 된통 혼나기도 했죠. 겨울이면, 아침에 일찍 나가 할머니가 처마에 걸린 고드름을 따 주시면 동생과 함께 핥아먹다가 혀가 안 떨어진 동생이 “느느 으거브(누나 이거 봐)”라고 장난을 쳤지요. 이렇게 요란한 장난으로 시작한 하루는 짧기만 했답니다. 


그런 추억을 함께한 할머니께서 저의 오른쪽 손바닥 안의 점을 오염물로 오해하시고 주름 가득한 거친 손으로 박박 닦아주었던 날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잘 지워지지 않는다고 피가 나기 직전까지 닦았는데도 너무 어렸던 나는 ‘점’이라는 말을 몰라서 아프다고 징징거리기만 했습니다. 닦일 리 없는 점을 억지로 닦으시다가 흐릿해진 점을 한참 살펴보시더니 그제야 할머니가 미안하신 듯, “아이고오, 이거 점이구만. 아파서 울었냐?”라고 달래주시던 게 생각이 납니다. 그러고 나선 미안하신지 그 작은 손바닥에 로션을, 크림을 얼마나 많이 발라 주셨는지요. 거칠던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보들보들해질 때까지 할머니는 내 오른손을 그렇게 만져주셨습니다. 지금은 그 점이 완전히 사라진 걸 알게 되시면 할머니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요?


이렇게 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면, 우리 가족은 많은 그리움에 잠깁니다. 시어머니인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따른 둘째 며느리였던 나의 엄마는 맏며느리가 할 일도 잘 해냈고, 딸이 귀한 집에 딸을 낳았다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런 고생을 하실 줄 아셨을까요.      


할아버지는 꽤 오랜 기간 고생하시다가 중풍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후에, 할머니는 외교관이셨던 큰아버지가 지내시는 독일 -당시 서독- 큰 집에서 지내시다가 다치시는 바람에 귀국하신 이후에는 작은아버지 댁에서 지내셨습니다. 그러던 중, 할머니가 저희 집에 오신 날이었습니다. (저는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이지만) 할머니는 우리와 살고 싶으시다고, 엄마와 아빠에게 사정했다고 하셨어요. 그날 밤, 저도 잠결에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소리들이 어렴풋 떠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빠의 좋은 발령처를 뒤로하고 다시 시골로 가야 했습니다. 물론 엄마와 아빠는 할머니의 속사정을 의아하게 들으셨지만 불안해 보이는 할머니를 그냥 둘 수는 없었겠지요. 나중에 할머니가 셋째 며느리에게 구박받고 지내셨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우리 집에 위선자가 있었던 것을 그땐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날 이후, 우리는 다시 몇 년을 할머니와 살게 되었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장례가 끝난 후, 아빠의 남매들이 모인 그날, 결국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어른들끼리 그렇게 욕하고 큰 소리로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저에겐 너무 큰 충격이었습니다. 항상 사이좋던 여섯 남매였는데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크게 다투고 왜 누군가는 울었을까요. 짐작하셨겠지만, 할머니가 고생한 아빠와 엄마에게 남기신 땅, 유산이 문제였습니다. 왜 그걸 우리가 더 많이 갖느냐 뭐, 그런 아침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뻔한 어른들의 위선이 무너지고 욕심으로 가득한 다툼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부모 공양은 하지도 않으신 분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아프실 때, 두 분의 병간호를 도맡아 하신 엄마와 아빠의 노고를 무시하며, 동생이고 형이라는 이유로, 아픈 부모 돌보느라 고생을 제일 많이 한 며느리와 몸이 불편한 아들에게 물려주신 얼마 되지도 않는 유산을 빼앗다시피 나누었다는 것은, 제가 고등학교 입학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앞선 글 ‘울퉁불퉁 새벽 산책로’에서 말했듯이- 엄마는 집에 없던 때였는데, 고모들과 작은엄마가 엄마의 험담을 할 때면 제 속에서 목구멍 가득 차오른 말은, 고모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께 좀 더 신경 쓰고 잘해드렸다면 아니, 우리 엄마를 좀 내버려 두기라도 했으면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안의 여자들이 모두 돌아가며, 우리 엄마를 괴롭힌 것을 내가 보고 들었는데 어디서 내 엄마 험담이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습니다. 없는 말도 지어내고, 이간질하느라 바쁜 손아랫동서 때문에 마음고생 심했다는 것을 딸인 제가 안다고. 둘째 며느리임에도 맏며느리보다 더 정성과 마음을 다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내 엄마가 짊어졌던, 여물지 못한 의무감들. 그것들은 어리고 또 여렸던 엄마를 지독하게 괴롭혔을 거고, 그것이 결국, 저의 사춘기를 망쳐버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오늘에서야 엄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묵은 기억과 감정을 모조리 여기에 담아내니 이제는 엄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버릴 수 있는 날이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좋았던 할머니, 할아버지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 그곳으로 가게 된다면 가능할까요? 그 세계가 있다면 지금도 그곳에서 우리의 모습을 내려 보고 계시겠지요. 믿음에 상관없이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곳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지금의 저를 기다리고 계신다면, 역시 솔직하고, 기억력이 좋다고 하시며 흐뭇하게 웃고 계시겠지요?


저는 종교는 없지만, 신의 존재는 믿기에 ‘남에게 해 끼치지 말고 잘 살자.’라는 생각 하곤 합니다. 만약 제가 생각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언젠가 천국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서 손 한번 꼭 잡고, 어릴 때처럼 꼭 안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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