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긴 뭐가 되냐 말이다
설령 머릿속의 내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라도, 이대로 라면 마음속의 나는 그렇지 못할 것 같았다. 되레 언짢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머리 위를 꼬나보고 있지 않으려나.
성난 마음속의 나를 달래기 위해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건네야 했다.
답은 간단하다.
작은 레고 블록처럼, 누군가에 의해 내 쓰임새가 결정되는 삶을 사는 것은 분명, 불행할 것이다. 이미 그런 일에 대한 경험은 우리들 모두가 지겹도록 쌓여오지 않았던가.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 시절이나, 상명하복의 군대 시절, 혹은 시험이나 취업을 앞둔 수험생 시절에.
물론 개중에도 행복한 친구들은 분명 존재했다. 자신의 의지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기꺼이 그 시절을 감내하는 친구들은 분명,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깨닫기 전까지는, 부모님이 가르쳐주고 이끄는 대로 걷고 또 걸었다. 그것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는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부모님의 바람이었을지도.
비로소 그 울타리를 넘어 나 스스로 설 수 있게 되었을 땐, 하고 싶은 것만 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린 상태였다. 아니, 사실 홀로 서있었을 뿐,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도 잘 몰랐을 것이다. 홀로 서는 것이 처음인 상황이 낯설고 두려워 못내 핑곗거리를 찾으려던 것이었을 게다.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그 핑계 한 마디를.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한 걸음을 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우리의 부모님과 부모님의 부모님이 그러했듯이. 그렇게 비로소 살아간다는 것을 배우는 것 아닐까.
그래도 참으로 다행인 것은, 돈을 벌고 싶다는 욕구는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속적이거나 탐욕스럽다기보다는 절박한 생존본능에 가까웠다. 걷지 못하겠으면 기어서라도 가도록 만드는 어떠한 강력한 본능.
그래서, 불행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 쓰이고 버려지는 순환구조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셈인가?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