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가 프루스트는 독서에 대해 '혼자 남은 상태, 즉 고독 속에서만 발휘되는 지적능력'이라고 했다. 이 말을 이어 장 그르니에는 <일상적인 삶>에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깨지기 쉬운 어떤 고취된 상태, 우리를 그 상태로 두는 것이 바로 독서”라고 말했다. 이런 문장을 보면 독서는 오롯이 혼자 하는 행위이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은 고요한 상태를 방해하는 것만 같다. 장 그르니에가 살던 시절엔 그랬을 수 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 독서는 고독 속에서 사유하는 행위가 맞지만 그 고독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었다. 고독을 방해하는 주범은 함께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5분이 멀다 하고 자석에 끌리듯 휴대폰으로 SNS를 확인하는 ‘나’ 말이다. 요즘 지하철에서 책 읽고 있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만약 있다면 그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휴대폰 배터리가 다 떨어진 사람일 것이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주변의 온갖 유혹에 맞서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는 내 옆의 누군가 이다. 함께 책을 읽는 존재가 있는 것이 내 최악의 산만함을 막아주기도 한다. 프루스트와 장 그르니에의 문장을 지금의 상황에 맞게 고쳐보면 ‘혼자 있으면 깨지기 쉬운 고독을 유지하기 위해 우린 누군가와 함께 독서’를 한다.
물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혼자하는 독서가 주는 이점들도 많다. 휴대폰과 같은 유혹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혼자서도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하며 독서의 세계를 성실히 유영하고 사유를 확장해 가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아쉽게도 난 아니다. 그런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처럼 집중력과 성실성이 부족한 사람들은 어떻게 독서력을 키워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것인가.
20대에는 성실함을 능력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땐 아직 발현되지 않은 특별한 능력이 나에게 잠재되어 있다고 믿던 자신만만한 나이였고, 어떤 사람을 ‘성실하다’고 묘사하면 칭찬이 아닌 ‘특출 난 재능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딱히 칭찬할 것이 없을 때 꺼내는 맛없는 칭찬 정도. 그리고 나이가 들며 내게 부족했던 건 특출한 재능이 아니라 그토록 시시하게 여기던 성실함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아무리 특별한 원석이어도 성실함으로 갈고닦지 않으면 다이아몬드가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모든 재능을 이기는 재능이었다.
성실하다고 자부할 수 있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성실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를 설명하는 덕목이란 것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인지라 그것이 있다 없다 많다 적다를 규정하는 건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여러모로 다재다능하고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어지간히 뭘 해서는 잘한다고 말하기도 쑥스럽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반복되는 작심삼일 앞에 자신의 인내, 끈기, 성실의 부족을 탓하며 자괴감을 느낄 때가 더 많다. 만성피로처럼 만성 끈기 부족에 시달린다. 피로엔 ‘우루사’가 있지만 끈기 부족엔 약이 없다.
이럴 땐 자신과 싸움을 벌이며 자책하기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나처럼 성실성이 부족하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을 모아 ‘부족’을 이루는 것이다. 일명 부족한 부족. 이들은 모여서 힘을 합치는 게 약이다.
책을 읽고 싶은데 끝까지 읽을 자신이 없으면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함께 모인다. 각자 함량 미달의 성실성 내어놓고 그것을 합쳐보자. 어떤 이는 성실 20%, 어떤 이는 10%, 어떤 이는 40%, 어떤 이는 30%.... 그렇게 꺼낸 성실성을 모두 합치면 합계는 100이 되고 이제부터는 합친 100을 나의 성실성으로 삼는 것이다. 혼자일 땐 부족함이었지만 모여서 합치면 집단지성, 집단성실이 발휘된다. 이게 어떤 은유가 아니고 진짜 그렇다. 신약성경 속에 나오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의 군중이 배부르게 먹고도 남았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란 게 이런 것 아니었겠나 싶다. 작고 모자란 것들의 합은 그 합 이상의 기적을 낳는다.
회사생활도 집단의 힘에 의해 하루에 9시간씩 성실을 발휘하는 조직이지만 월급이라는 금전 보상에 의해 주로 움직인다. 내가 지향하는 독서모임이나 기타 작은 모임들은 외부의 보상과 상관없이 자신의 필요와 성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나를 확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조직 폭력배만 무서운 것이 아니다. 조직 성실배는 조용하게 무섭다. 사람을 세는 최소단위가 1명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경우에 따라서 우리는 2명이 하나가 될 수도 있고 10명이 하나가 될 수도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에서 혈연관계의 가족은 아무도 없다.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곁을 내주며 가족이라는 단위를 만든다. 그렇게 삶의 고난들을 헤쳐나간다. 알고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다 그렇지 않을까. 독서뿐만 아니라 내가 부족하다고 느낄 땐 늘 이렇게 소소하게 모임을 만들어 서로 기대어 갔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다양한 모임들을 시도하고 있다.
20대에 아는 선배가 나에게 “넌 네트워킹에 재주가 있는 거 같아.”라고 말했다.
네트워킹? 그땐 그 말의 뜻을 잘 몰랐다. 책방에서 모임을 하며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라고 하고 싶다. 내향형에다 대단히 다정하지도 않고 인간관계 맺기를 즐기는 사람도 아니지만 모임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거 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은 있는데 자신이 없을 땐 일단 모임을 만든다. 외향적인 사람들만 모임을 좋아할 것 같지만 늘 그렇지도 않다. 내향인들 안에 있는 작은 외향성을 합치면 엄청 활기찬 모임이 되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을 부정적으로 묘사할 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고 하는데 다르게 보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무려 산에도 가는’ 것이다. 이게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