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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Sep 29. 2019

솔직하지만 정돈된 글을

학창시절 일기장 중에 자물쇠가 달린 노트가 인기가 많았다. 일기는 혼자만의 비밀의 방이다. 남에게 들키기 싫은 마음이 일기장에 자물쇠를 채웠을 것이다. 다른 글과 달리 일기는 남에게 드러내기 어려운 얘기나 화난 마음이 날 것 그대로 묻어있는 욕설, 도를 넘는 타인에 대한 비방까지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글을 쓴 날이면 누가 볼 새라 자물쇠를 두 번, 세 번 확인하곤 했다. 


글을 쓰고자 마음먹은 사람은 자신만의 방에 은닉한 채 혼자 고독하게 읽고 쓰려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하트를 날리거나 댓글 하나라도 달리면 반가워하는 마음의 저변에는 글로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글쓰기는 결국 공적인 영역,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말을 써도 되는 걸까?’라는 고민을 하는 것도 남이 보게 될 경우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주저하거나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애매한 글을 만들거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글 속에 숨기도 한다. 하지만 솔직한 자신과 대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라는 미지의 수를 탐험할 수 있게 된다.


예술가들 중에는 삶이 평탄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유독 많다. 거꾸로 뒤집어 보면 삶이 불행해서 예술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수한 고통의 지층이 예술의 계보를 이어오고 예술이 주는 위안은 시공을 초월해서 여전히 유효하다. 글쓰기 코칭을 할 때 불행이 글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불행했던 가정사, 꽁꽁 숨겨왔던 문제 등 드러내기 힘들었던 한 사람의 내밀한 세계가 글이라는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난다. 상처는 숨기고 감추면 곪아서 결국 터지고 만다. 고통스럽더라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응시할 때 치유의 길이 열린다. 


고통스러운 감정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불행은 곧 ‘내 삶이 괜찮지 않음’과 동격이라 여겨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들의 이름뿐인 위로도 달갑지 않았다. 한 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때 일을 떠올리며 글을 썼다. 몇 번이나 쓰다 말다를 반복했지만 한 편의 글로 정리하고 나니 예전처럼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상황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정리되었고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회복되었던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일은 어쩔 수 없었던 ‘사고’ 였을 뿐 더 이상 지고 갈 필요가 없는 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던 죄책감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한 글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고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사례도 내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솔직한 글쓰기의 치유 효과 덕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솔직한 글, 거짓 없는 글이 무조건 좋기만 한 걸까?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마땅히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지 않았고 감정을 은폐하지 않았다. 사회적인 관습을 거부한 채 ‘연극’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뫼르소가 아니다. 솔직한 글이 좋다고 무조건 느끼는 대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자. 이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내 딸이, 내 동생이, 내 조카가 피해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이기적인 생각일는지 모른다. 솔직한 심정이 그렇더라도 이렇게 쓸 경우 생기는 파급효과는 굳이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금방 알 수 있다. 최초의 감정은 그렇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자 부모와 가족의 피 끓는 심정이 공감되고 무방비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에 대한 연민, 기성세대로서의 죄책감, 이미 벌어진 사고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등 복잡한 심정에 휩싸이게 된다. 최초의 감정이 들어섰던 자리에 정리된 감정과 합리적인 사고가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처음 느꼈던 감정대로 글을 쓸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정리된 생각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게 되고 타인의 마음에 내 마음을 포개려는 노력이 싹트게 된다. 


SNS에서 연일 쏟아지는 날선 말과 타인에 대한 비방은 최초의 생각,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정리하지 않은 채 그대로 쏟아냈기 때문이다. 언어폭력 역시 물리적 폭력 못지않게 사람을 상하게 한다. 솔직하게 쓰되 정돈된 마음을 담은 글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young_geul.1016/

블로그: https://blog.naver.com/mndstar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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