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 돌덩이라도 들었니? 왜 이렇게 무거워?” 한 번이라도 내 가방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열에 아홉은 하는 말이다. 맞다. 내 가방은 언제나 무겁다. 외출할 때면 책 한 두 권은 넣어야 안심이 된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경우 남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책 이외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약속과 약속 사이의 공백도 책 읽기 딱 좋은 시간이다. 그래서 깜박하고 책을 두고 온 날이면 하루 종일 찜찜하다. 메모지와 필기도구도 빠질 수 없다. 책을 읽다가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라도 발견하면 바로 표시하기 위해서다.
가끔씩 나에게도 영감(?)이라는 게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머릿속에 담아두고 나중에 써먹어야지 하는 안일한 생각 따위는 버린 지 오래다. 가까스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그 즉시 적어두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수도 없이 겪어 본 자의 겸허한 자세다. 그러기 위해서는 틈틈이 메모를 해 두어야 하고 이때 필요한 것은 펜과 노트, 그리고 키보드다. 일기예보에 없던 첫눈이 내리거나 스쳐 지나가는 수 사람 속에서 오래전 헤어진 첫사랑이라도 발견한다면,,, 방금 본 영화가 마음에 남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키보드가 없으면 낭패다.
가방 속의 터줏대감이 또 있다. 나의 오랜 동반자 태블릿 PC다. 책이 무거울 경우 가끔씩 두고 집을 나설 때가 있지만 태블릿 PC는 그럴 수 없다. 종이책을 대신할 전자책 앱이 깔려 있을 뿐 아니라 필요한 자료가 빼곡하게 들어있어 언제든 열어 볼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넷플릭스에 접속해서 영화를 볼 때도 없으면 섭섭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깜박하고 두고 온 날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에 시달린다. 멀티를 훌륭하게 해 내는 태블릿 PC는 어느덧 나의 소중한 동반자가 되었다.
여자라면 거울과 립스틱 정도는 가지고 다녀야 하기에 파우치도 넣어야 하고 눈 속의 렌즈는 언제든 뻑뻑해져서 이물감을 불러올지 모르기에 안경 또한 필수품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버스 번호판을 잘못 읽어서 엉뚱한 곳에 내리는 불상사를 만날 수 있다. 요즘처럼 날씨가 무더운 날은 양산도 챙겨야 한다. 지난여름 모자 하나 없이 자신만만하게 돌아다녔더니 ‘동남아에 휴가 다녀오셨나 봐요’라는 말을 들었다. 바로 양산을 장만했다.
이미 아열대의 반열에 오른 한국의 혹독한 여름날씨 덕분에 내 피부는 건강하고 매끈한 구릿빛이라기보다는 얼룩덜룩 보기 흉하게 그을린 모습에 가까워졌다. 시계 자국이 선명한 손목과 샌들의 라인을 따라 명과 암의 경계가 확연해진 발을 보고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다. 풍성한 머리카락이나 긴 다리 대신 멜라닌 색소만 풍부한 피부를 물려주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꼭 나쁜 유전자에 대해서만 부모탓을 한다. 양산 타령은 이쯤 해 두고 이 외에도 현대인의 필수품 스마트폰과 에어팟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가방은 이제 배불뚝이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변했다고 모양과 소재가 제각각인 물건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아우성을 친다. 무거운 하중을 감당해야 하는 불쌍한 내 어깨는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big bag을 고집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다. 핸드폰도 들어가지 않는 손바닥만 한 앙증맞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여자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여행을 갈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여행 내내 자기는 내 짐꾼이라고 투덜거리는 남편의 푸념에도 짐은 좀처럼 줄어들 줄 모른다. 속옷은 넉넉하게 준비하는 게 당연하고 모처럼의 여행이니 교복처럼 한 가지 아이템만 주구장창 착용할 수는 없는 일, 상의 몇 벌을 고르고 나니 그에 맞는 하의도 챙겨야 구색이 맞는다. 편하게 입을 면바지와 티셔츠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한두 가지 액세서리는 챙겨야 지루하지 않은 룩을 연출할 수 있고 모처럼의 여행이니 다소 과감한 주얼리도 도전해 보기로 한다. ‘패션의 완성은 디테일에 있다’는 어디선가 들은 말은 중얼거리면서 부지런히 짐을 싼다. 여행을 가면 모발관리가 쉽기 않다. 아무리 열심히 샴푸를 해도 머리카락은 빗자루 마냥 거칠어지고 바람이 불면 산발이 되는 머리카락 때문에 멋진 풍경을 담은 사진을 수도 없이 삭제해야 했던 슬픈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슬그머니 모자에 손이 간다.
화장품과 비상약, 세면도구에다 외국에 나가면 미친 듯이 당기는 컵라면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벼운 실리퍼도 없으면 무척 불편하다. 이제 캐리어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누가 보면 이민이라도 가는 줄 알 것이다. 마지막까지 짐과의 사투를 벌이며 어떻게든 줄여보려 애쓰며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똑같다. 사람일은 모르니까 일단은 챙기자는 것. 하지만 현지에 도착하는 순간 바로 깨닫는다. 가지고 간 물건의 채 반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왜 이렇게 바리바리 싸 와서 생고생인가 싶지만 언제나 뒤늦은 후회일 뿐이다. 여권과 스마트폰, 지갑과 갈아입을 옷 한두 벌만 챙긴 가벼운 가방은 나와는 먼 얘기다.
불안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 안 쓸 확률이 99%라도 1%의 확률이라도 대비해야 한다는 강박이 부른 참사다.
쓰지도 않을 물건을 잔뜩 욱여넣은 캐리어와 방금 방이라도 뺀 사람 같은 부풀어 오른 가방은 산적한 내 문제들 같다. 언젠가는 해결이 되겠지만 지금 당장은 어찌할 수 없는 그런 것들 말이다. 살아가는 동안 삶의 문제는 언제나 쌓여갈 것이고 간신히 하나를 빼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얼른 들어와서 자리를 잡는다. 죽어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가방 속의 짐이라도 덜어내 보자. 몸이라도 가벼워지도록’ 나는 속으로 다짐한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꿋꿋하게 짐을 꾸려 집을 나선다.
혹시 나는 보부상의 후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