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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 Feb 14. 2024

젠더와 탈식민주의

최근 논문이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따뜻할 수 있구나, 깨닫게 해 준 조금 찜찜한 글이 있었다. 재일조선인이자 한국에서 위안부 이슈 활동가로 일한 바 있는 야마시타 영애 교수의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글. 그가 쓴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도 지난해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더랬다. 아래 영어 소논문을 읽으면서, 여성들의 국제 연대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고,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관련 책을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https://kias.asafas.kyoto-u.ac.jp/1st_period/contents/pdf/kb3_1/14yamashita.pdf)


한편, 국제법에 젠더를 기입한 맥두걸 보고서의 한계를 지적하는 신지영 교수의 <일다> 기고글은 이와 결이 조금 다르다. (https://m.ildaro.com/9141)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관점에서 <제인에어>를 재해석한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가 떠오르는 글이었달지. 사실 두 글은 관점 차이라기보다는, 젠더와 탈식민주의 중 어떤 측면을 ‘더’ 강조하느냐의 차이 같다. (아래는 각각 발췌.) 아무튼 좋은 글들을 읽으면서 여성 연구자/활동가의 관점이 남성들보다 훨씬…. 기존의 현상들을 비틀어보는 데 능하다고 생각했다. (편견 죄송..)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은 이제는 전혀 새롭지 않은 주제일 수 있지만, 이 주제가 건드려져서, 3월 겸사겸사 대만 위안부 문제를 볼 수 있는 장소를 가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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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Japanese comfort women are excluded from the group of victims, the problem of Japan’s sexual violation of human rights is excluded from discussion. In other words, as long as Japanese comfort women are not rightly recognized as victims, it will remain impossible to refute the conservative argument, and the issue will remain unresolved.


In order to properly recognize Japanese comfort women as victims, not only is it necessary to dissolve Japanese nationalism towards other countries, but it is also necessary to dissolve the nationalism festering within Japan itself. This is not an easy task.


But when both sides share an awareness of this difficulty and cooperate with each other, the process of resolving the comfort women issue may be key to overcoming nationalism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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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의문이 생긴다. <맥두걸 보고서> 국제법에 젠더를 기입하고 위안부 문제를 국내적 무력충돌로 해석하여 전쟁법의 틀을 확장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다섯 가지 범죄행위의 (인도에 반한 범죄, 노예행위, 집단학살, 고문, 전쟁범죄) 적용할 ,  ‘식민지배라는 항목은 넣지 않았을까? 국제법을 만든 주체가 바로 식민주의를 통해 강대국이  제국들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국제범죄의 영역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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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 다 상반되는 듯(?) 좋은 글들이라 읽어보셔도 좋을 듯. 언젠가 관련 취재를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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