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들린 곳은 박경리 문학관이었다. 선생님 머리 위에 참새 한마리가 앉아 있다. 고 녀석. 마지막까지 선생님은 여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만 주고 계신다.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님의 생애를 설명해주시는 해설사 선생님은 마치 단아한 한 그루의 나무같다.
올모스트홈스테이 & 환영 선물
이 곳으로 숙소를 정한 건, 소설 『토지』 의 인물들처럼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은 바구니엔 쌀과자, 드립커피, 하동 녹차 티백이 들어있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침, 연우제다에서 만든 녹차를 우려내니 하동에서의 풋풋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하동 차나무의 색을 담은 수첩엔 여린 첫물차같은 글을 담고 싶었다. 그런데 난 아직 여백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장을 펼칠 때마다 선생님의 이 말씀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희망의 여백
'아무리 좁은 면이라도 희망의 여백은 두렵다.'
박경리 선생님이 매일 밤 글을 써내려갔던 건 끊임없이 희망을 도려내면서도 다시 삶의 여백에 발을 내미는 과정이었다. 새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찍듯이, 매일 이 희망의 여백은 우리의 글줄로 채워지고 있다. 나는 희망의 여백을 들추었다가 다시 서가에 꽂아 놓는다. 언제쯤 나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입을 굳게 다문 용병처럼 그 새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갈 것인가?
햇살 바람
방으로 돌아와 잠시 쉬었다. 한 낮의 더위를 피해 방으로 들어오니 길다란 햇살도 따라 들어온다. 햇살은 툇마루에 앉아 신발을 벗어놓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나를 보고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바깥에는 바람과 함께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다. 이슬을 머금은 아침, 느리게 멈춘 듯한 시계 바늘같은 느지막한 오후,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한 밤, 시간도 저마다 새로운 옷을 입고 나를 찾아와 잠들 때까지 함께 있어 주었다. 아침마다 새소리를 들으면서 앵두나무를 마주보며 식사하는 건 행복이었다. 수돗가에서 손을 닦고 지리산 풍경을 마주댄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는 것은 축복이었다.
평사리공원의 노을
섬진강과 해란강이 왜 다를까 하고 생각한다. 아름답기론 섬진강 편이다. 조촐한 여자같이 청아한 소복의 과부같이, 백사(白沙)는 또 얼마나 청결하였는가.
『토지』3부, 번뇌무한 (煩惱無限) 중
흐르는 강물 소리에 도시 생활의 묵은 마음때가 씻겨져 나가는 것만 같다. 사락사락 엷은 모래 위를 밟으니 숨차고 두근거리기도 했던 오늘 낮의 여정이 조금씩 조금씩 잠잠해진다. 조용히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땐 알지 못했다. 저 노을처럼 무언가 내 마음 속에 잔잔히 차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무언가 걷잡을 수 없이 내 안에서 터져 나온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아니, 나는 흘려보내고 싶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라는 큰 강에 나를 흘려보내고 싶었던 것 같다.
『토지』1부 '자서'
행복과 불행은 과연 무엇일까? 그렇게 분류되는 불행, 그렇게 가치 지어지는 행복 때문에, 내 안의 노을이 그렇게 그토록 타올랐을까?
호열자라는 새카만 죽음의 빛깔과 벼라는 황금빛 이 삶과 죽음의 대비가 하나의 색채로서 확대되고 심화되고, 그것이 토지라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