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타고 낮은 굴뚝의 연기와 구수한 소의 냄새가 섞여 날아든다. 찌르레기와 작은 새소리가 바람을 노래한다. 참새들이 낮은 가지에 앉아 지저귈 때, 제비는 드넓게 펼쳐지는 산등성이 위를 날고 직박구리는 앵두나무 잎사귀 사이에서 붉고 탐스러운 앵두 한알을 부리에 문다.
멀리서 들려오는 음메에 하는 소의 울음소리가 정겨우면서도 구슬프다. 돌담 아래 펼쳐진 산기슭 마을을 바라보면서 그저 이대로 바람이 되고 싶다.
아침부터 하늘이 맑다. 푸른 하늘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붉게 물든 탐스런 앵두. 앵두를 한 움큼 따면서 수돗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들여다본다. 어제 오후, 박경리 문학관에서 본 앵두처럼 붉은 글귀가 떠오른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내 마음을 헤집던 그 물줄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쌍계사 불일폭포를 향해 걷는다. 아침부터 작열하는 태양, 찌는 듯한 무더위가 내 발걸음을 숲으로 이끈다. 누가 걷고 누가 이끄는 것일까. 이 작은 발걸음 하나에도 수없이 많은 인연의 작용이 얽혀 있다.
한가로운 약숫가에는 젊은 남녀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따금씩 긴 침묵이 흐르고 대숲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이 존재한다. 잿빛같은 세월이 묻어있는 하얀 석탑이 내리꽂는 태양을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 재래식 화장실마저 자연과 하나가 된 이곳, 물 한 방울 쓰지 않고 땅으로 돌려보내는 순환에 저절로 나를 낮추게 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예전에는 원죄라던가, 선악과를 먹고 수치심에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다는 성경 말씀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어떻게 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죄책감을 심어주고 강요하고 통제하려는 모든 구속과 억압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권리가 있는 자유 세대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죄책감은 나의 핏줄 밑바닥에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세월이 가져다준 고통을 통해서 나는 '원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박경리 선생님의 이말씀은 아마 그를 두고 하신 것이리라.
쌍계사 대웅전
대웅전에 이르니 중년의 남녀가 처마 아래서 땀을 닦고 있다. 부처님께 합장을 하고 돌아 나와 곧장 불일 폭포로 향한다. 잠시 땀을 식히며 앉아 있으니 호랑나비 한 마리도 곁에 와서 날개를 말린다.
불일 폭포로 향하는 다리(왼쪽) 나비(오른쪽)
중간쯤 갔을까, 아직도 불일 폭포가 아니라니! 의자에 앉아서 쉬고 계신 아주머니께 길을 여쭈어 보니 아직 좀 더 남았단다. 내려갈까 말까 고민되기 시작하는 찰나, "여행 왔어? 산에 혼자 다니면 위험한데.." 하고 걱정해주신다. 내가 하동에 어떻게 여행 오게 됐는지, 하동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자연과 가까이 살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아주머니도 원래는 다른 도시에 사시다가 은퇴 후 하동으로 오셨다고 한다. 시골살이도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라며 그래도 젊을 때 일찍 내려와서 자리 잡으면 좋다고 조언해주신다.
"그럼 어디에 묵어?"
"최참판댁이요."
"밥은 먹었어? 여기서 어떻게 다시 돌아가려고?
"아, 내려가서 식당에서 밥 먹고 버스 타려구요."
"우리 집이 그 근처인데, 내가 태워다 줄게. 가는 길에 우리집 구경하고 갈래?"
아주머니는 불일폭포에서 내려온 선녀임이 분명했다.
드디어 만난 불일폭포
아주머니는 날쌘 다람쥐처럼 어찌나 산을 잘 오르시는지, 부지런히 뒤따라갔다. 함께 이야기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불일 폭포다. 물이 말랐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직 장마철 전이라 가물었는데도 시원한 소리를 내며 폭포가 쏟아지고 있다. 이 물줄기는 어디서 왔는가. 마르지 않는 원류(源流). 메말랐던 마음에도 깊은 수원(水源)에는 이렇게 폭포가 쏟아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눈가에 맺히는 물방울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의 수원(水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누르며 짐짓 밝은 표정을 짓는다.
내려가는 길, 지난번 한라산 영실코스 등반 후 심상치 않았던 왼쪽 무릎이 또다시 쭈뼛거린다. 그러자 아주머니께서 잠시 앉았다 가자고 하신다. 이런저런 인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하다.